1979년 2월 21일, 모두가 잠든 깊은 밤이었다. 거실에서 전화벨이 사납게 울렸다. 아내는 하루 종일 두 아이를 돌보느라 지쳐 곯아 떨어져 있었다. 혹시나 깰까 봐 까치발을 하고 거실로 나가 수화기를 들었다. 그러나 이내 전화가 끊겼다. 한밤중, 시도 때도 없이 전화하는 사람이 있었다. 길종 형이었다.
지난 가을, 형수가 프랑스로 연수를 떠나고 나서는 늦은 밤이면 나에게 전화를 하였다. 형수가 떠난 지 얼마 안 되어서는 가끔 하던 것이 시간이 가면서 횟수가 잦아졌다. 형은 형수를 보낸 것을 후회하였다. 형수는 유학할 기회가 여러 번 있었으나 형의 반대로 다른 교수들에게 양보하곤 하였었다.
그것을 보고 있던 내가 나서 무조건 떠나게 했던 것이었다. 나는 촬영일정으로 아내와 함께 하는 휴가를 못 갖는 대신 아내에게 자주 언니가 사는 미국이나 해외여행을 가도록 하였다. 형은 그러는 나를 너무 신기해했다.
"너는 어떻게 혼자 지낼 수 있냐..." 부부가 서로의 일로 늘 바쁘게 지낸 탓에 함께 할 시간이 많지 않았다고 해도 형수 없이 혼자 지내는 것이 쉽지 않았던 형이었다.
미국 유학시절, 형수는 형이 대학원을 마칠 때까지 아이를 키우고 형의 학업을 위해 일을 하였다. 형이 공부를 마치고 현장에 뛰어든 후에야 대학원에서 하던 공부를 마쳤다. 형수는 한국으로 돌아와서도 영화계에서 자유롭게 활동하지 못 하는 남편을 위해 지방대학을 오가며 조력자로서 늘 곁을 지켰다.
영화 <바보들의 행진> 이 작품과 흥행에서 성공하자 하길종의 영화계 입지는 나아졌지만 재미만을 원하는 관객과 돈이 최고인 제작자들의 주문은 변한 것이 없었다. 샤머니즘에 대한 <한네의 승천> 은 철저하게 외면당했고, <속, 별들의 고향> <병태와 영자> 는 대박을 쳤다. 관객들은 하길종 영화에 환호하였고 제작자들은 하길종 감독을 잡기에 혈안이 되었다. 병태와> 속,> 한네의> 바보들의>
영화계와 평단은 그가 마침내 한국관객을 알기 시작하였다고 떠들어댔다. 그가 연타석 홈런으로 흥분하고 있다고도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하길종을 모르는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그가 만든 영화들이 흥행몰이에 성공하자 그는 오히려 허탈해했다. 정작 자신의 메시지가 담긴 영화는 외면당하는 현실에 자조의 웃음만 터뜨릴 뿐이었다.
“피고! 다 그런 거 아니갔소... 허허허...” 하길종은 군부독재 시절에 숨죽여 지내던 군상들을 법정에 선 ‘피고’에 비유하며 쓴 웃음을 짓곤 했다. 하길종은 귀국 초기 몇몇 젊은 감독들과 영화의 새 바람을 일으키자며 <영상시대> 라는 이름으로 서클을 만들어 활동했었다. 그러나 차츰 한국영화계의 현실을 알아가면서 만나던 사람들로부터 멀어져 가기 시작하였다. 영상시대>
그는 돈 많은 제작자보다는 말단 스태프들과, 이름 있는 스타보다는 무명 배우와 소주잔을 기울이는 것을 좋아하였다. 세력 있는 신문사 기자보다는 힘없는 삼류 영화잡지 기자들과 맥주잔을 맞대는 것을 더 행복해 하였다. 아무리 대박 소리가 울려도 그는 혼자였다. 영화에 대하여 밤새 떠들고 고민하고 토론할 친구가 그리웠다. 그런 친구가 없었다. 그는 지쳐가고 있었다.
“한국영화가 이렇게 가면 안 되는데...” 그는 잠들 수 없었다. 유일한 말벗인 아내마저 곁에 없었다. 뜻이 통하는 친구와 떠들다가 잠들고 싶었다.
“따르릉”
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재빠르게 수화기를 들었다. “형?” “그래. 아직 안 잤니?” 형이 다시 전화할 줄 알고 기다리고 있었다고 하였다. 나는 초등학생시절부터 형이 집에 들어올 때까지 자지 않고 기다리게끔 잘 훈련되어 있었다. 내가 성인이 되고 그가 미국으로 떠나자 비로소 자유롭게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그 후 그의 곁은 형수가 지켰다. 그런데 형수가 떠나자 다시 나를 찾기 시작했다. 물론 형이 그러리라는 걸 충분히 알고도 남았다. 어린 시절, 나는 형과 무던히도 많이 싸웠다. 나는 형에게 지지 않으려고 결사적으로 덤볐고 형은 그런 나를 절대로 용서하지 않았다.
‘무지하게 터져서’ 며칠씩 학교를 못 간 적도 있었다. 그러나 우리에겐 아무 문제가 없었다. 어릴 적이나, 성인이 되어 애인이 생기고, 결혼하여 아내와 자식이 생겼어도 동생이라면, 형이라면... 서로의 하늘이었다. 이 세상 어느 누구도 우리 형제를 갈라놓을 수 없었다.
“야, 너, 그따위 영화에 출연하니?” 형은 내가 출연하는 영화는 한편도 빠짐없이 보았다. 이번에 출연한 영화가 주말에 개봉을 하였는데 대박을 터뜨리고 있었다. 그런데 언론의 호평과 흥행성공 보도로 잔뜩 기대를 갖고 본 영화가 형 눈엔 형편이 없었던 것이다. 그는 속이 상해서 맥주 몇 잔을 하고는 조목조목 잘못 된 부분을 짚어나갔다.
내가 그렇게 만들어지도록 방관하였다며 나무라는 것이었다. “내가 그거 감독했어?” 나는 참다못?꽥 소리를 질렀다. “임마, 그러니까 배우하지 말고 감독하라는 거 아니야!” 형의 소리가 더 커졌다. 그 말은 처음이 아니었다. 형이 귀국하여 첫 작품 <화분> 을 각색하고 콘티를 짤 때부터였다. 형은 이층에서, 나는 아래층에서 살고 있을 때였다. 화분>
콘티를 하다가 뭔가가 안 풀리면 한밤중에도 아래층으로 내려와 자고 있는 나를 깨웠다. 그리고 동이 틀 때까지 토론을 하였다. 내가 결혼한 후도 달라질 게 없었다. 그의 두 번째 영화 <수절> 때였다. 한밤의 신혼 방을 두들기는 것은 예사였고 급하면 노크도 없이 뛰어들었다. 수절>
형이 남산 아파트로 이사하여 떨어져 살 때도 그는 내가 ‘얼굴에 분칠이나 하며’ 배우 생활하는 것을 매우 안타까워했다. 배우보다는 감독으로서의 재능이 오히려 자기보다 더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사실 나도 일찍부터 감독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형보다 더 나은 감독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기에 형 뜻을 완강히 거절해 온 것이었다. 그 날도 “감독 안 해!” 하며 전화를 끊어버렸을 나였다.
그런데 그날 내 태도는 스스로 생각해도 의외였다. “그래, 형. 명심할게.” 이렇게 대답했다. 형의 뜻을 줄곧 완강히 거역해왔던 내가 어떻게... 그렇게 쉽게 대답하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아침이 되고 저녁이 되어... 아니, 영원히... 그 밤에 주고 받은 대화가 마지막이 될 줄은, 아무도 알지 못 했다.
수화기를 내리고 나니 새벽 5시를 알리는 괘종시계 소리가 들렸다. 캄캄한 창문 밖으로 겨울비가 보슬보슬 내리고 있었다. “비야, 고맙다. 오늘 촬영 펑크겠구나.” 다시 까치발을 하고 안방 문을 열었다. 아내가 두 아들을 끼고 곤히 잠들어 있었다. 그들이 깰까 봐 조용조용 이불 속으로 내 몸을 숨겼다. 그 시간까지는 모든 게 평화로웠다.
나의 아내와 두 아들, 형과 그 곁에 곤히 잠들어 있을 조카 지현, 그리고 프랑스에 있는 형수까지도. 그래, 그 시간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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