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숨 돌린 뒤 일을 마무리하자" 할 때의 '한숨'과 "왜 그렇게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짓니?" 할 때의 '한숨'은 뜻이 다르다. 이 때, 한숨은 다의어가 아니라 동음이의어다. 같은 어원에서 뜻이 퍼져나간 게 아니라, 의미 연관이 전혀 없는 형태소들이 우연히 같은 모양('한')을 취하고 있다는 뜻이다.
앞의 '한숨'에서 '한'은 '하나'라는 뜻이고, 뒤의 '한숨'에서 '한'은 크다는 뜻이다. 그래서 앞의 '한숨'은 한 번의 호흡(또는 숨을 한 번 쉴 동안)이나 잠깐 동안의 휴식 또는 잠을 뜻하고, 뒤의 '한숨'은 (근심이나 설움이 있을 때) 길게 몰아서 내쉬는 숨을 뜻한다.
한자어로는 태식(太息)이라고 한다. 앞의 한숨은 들이쉴 수도 내쉴 수도 있지만, 뒤의 한숨은 오로지 내쉴 수만 있다.
앞의 '한숨'과 어울리는 동사는 '돌리다' '자다' 따위고, 뒤의 '한숨'과 어울리는 동사는 '짓다'다. 그러면 '쉬다'는 어떨까? 이 동사는 주로 두번째 '한숨'과 어울리지만, 드물게는 첫번째 '한숨'과 어울리기도 한다. "그렇게 자꾸 한숨 쉬면 복 달아난다는 거 모르니?" 할 때의 '한숨'은 두번째 한숨이고, "한숨 쉬고 마저 걸읍시다" 할 때의 '한숨'은 첫번째 한숨이다.
여기선 '쉬다' 역시 동음이의어다. 한쪽의 '쉬다'는 호흡이고, 다른 쪽의 '쉬다'는 휴식이다. 그러나 이 두 '쉬다'가 처음엔 다의어였을 가능성도 있다. 즉 같은 어원에서 뜻이 갈려나왔을 수도 있다.
옛 한국인들에게, 호흡은 휴식이 아니었을까? 국어사학자들은 '숨'을 '쉬다'의 명사형(이나 전성명사)으로 본다. 그러니까 '숨(을) 쉬다'의 의미구조는 '춤(을) 추다'나 '잠(을) 자다', '꿈(을) 꾸다'와 동일하다. 일부 국어사학자들은 또, '쉬다'를 '살다(生)'의 동근어(同根語)로 여긴다. 하긴, 숨이 끊기는 순간 삶도 끊긴다.
어느 쪽 '한숨'인지 모를 한숨도 있다. 한국인 누구에게나 익숙할 한용운의 시 '님의 침묵'에서, 화자는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려갔습니다"라고 말한다. 이때의 '한숨'은 첫번째 한숨일까, 두번째 한숨일까? 어느 쪽으로 해석해도 무난할 듯 싶다.
'사랑의 말'이라는 주제 아래 우리가 만지작거릴 '한숨'은 '한숨짓다'의 '한숨'이다. 이 한숨은, '한숨 돌리다'의 한숨과 달리, 정한(情恨)을 담고 있다. 한숨은 사랑의 말 가운데서도 슬픈 사랑의 말이다. 기쁘거나 들뜬 상태에서 한숨을 짓는 사람은 없을 테다. 한숨은 한탄이고 탄식이다.
한숨은 쓰디쓸 뿐 달콤한 법이 없다. 그것은 웃음의 대척에 있다. 황인숙의 '담쟁이'라는 시는 "만져보는 거야./ 네 입술을./ 네 입술의 까슬함과 도드라짐./ 한숨과 웃음./ 만져보는 거야."라는 연으로 시작한다.
둘째 연에서는 '까슬함' 옆에 '보드라움'이 놓인다. 한숨과 웃음의 관계는 까슬함과 보드라움의 관계다. 그러니까 한숨은 울음에 가깝다. 채 터뜨리지 못한 울음이 한숨이다.
한숨은 이뤄지지 못한 사랑의 말, 뜻밖에 깨진 사랑의 말이다. 한숨에서 대뜸 연상되는 말들 가운데 하나가 '과부'인 것도 한숨이 슬픈 사랑의 말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한숨을 소재로 한 우리 옛 속담들은 흔히 '과부'를 등장시킨다.
이 자리에서 구체적으로 들춰내진 않겠다. 속담들이 더러 그렇듯, 비속한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속담은 민중의 지혜를 담고 있지만, 그 지혜의 적잖은 부분은 야비함이다. 민중은 지혜로우면서 야비하다. 아니, 그 야비함이 지혜다. 이 진실을 우아하고 섬뜩하게 보여준 영화 하나가 구로사와 아키라의 '7인의 사무라이'다.
'쿨'한 연인들에겐 촌스러움
이야기가 곁길로 샐 뻔했다. 한숨은 사랑의 말 가운데서도 전근대적 사랑의 말이다. 인스턴트 러브가 유행인 시대의 '쿨'(cool)한 연인들은 한숨짓는 것을 촌스럽다 여길 것이다.
이 시대에, 한 여자의 남자는 고정돼 있지 않고, 한 남자의 여자 역시 고정돼 있지 않(은 듯하)다. 동성 연인들끼리도 마찬가지일 테지. 차거나 차이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연애지상사(戀愛之常事)'지만, 그 갈라섬의 빈도는 점점 잦아지고, 그 충격력은 점점 작아진다. 오늘날의 연인들은 흔히 대체가능한 짝이고, 더러는 일회용 짝이다.
'일회용 면도기'나 '일회용 라이터' 할 때의 '일회용'에 해당하는 프랑스어는 '주타블'(jetable)이다. '주타블'의 본디 뜻은 '내팽개칠 수 있는' '내던질 수 있는'이라는 뜻이다. 한 번 쓰고 버리는 것이 '주타블'이다.
오늘날의 연인들은 점점 '주타블'해지고 있다. '주타블'한 연인들이 '주타블'한 사랑을 할 땐, 차거나 차이는 연애지상사가 일어나도, 그게 한숨을 낳을 것 같진 않다.
한숨은 괴로움이나 설움이나 근심 같은 부정적 심리상태의 생리적 등가물인데, '주타블'한 사랑의 세계에서는 그런 부정적 심리 상태가 어지간해선 치명적이지 않을 테니 말이다.
한숨낳는 사랑은 낭만적인 사랑
그것은 한숨을 낳는 사랑이 낭만적 사랑이라는 뜻이다. 한 사람의 짝은 오로지 한 사람일 뿐이고, 그 둘의 만남은 시간의 처음부터 이미 정해져 있다는 낭만적 세계관을 지닌 연인들한테서만, 그 말에 값하는 한숨이 나온다. 즉 큰 숨이 나온다. 그 큰 숨은 슬픔의 숨이고 설움의 숨이며 한탄의 숨이다.
몇몇 (옛) 유럽어에서 숨은 바람과 포개진다. 한숨은 마음속 깊은 골짜기에서 슬픔으로 회오리치는 바람이다. 극작가 에드몽 로스탕이 창조해낸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에게 그 슬픈 회오리바람은 숙명이었다.
실제의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1619~1655)가 한숨쟁이였는지는 모르겠으나, 로스탕의 시라노는 사랑하는 이 앞에서 사랑한다고 말하지 못한 한숨쟁이였다. 그 사랑에 희망의 빛이 비치기 직전 그가 거둔 숨은 세상에서 가장 크고 불행한 한숨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한숨이 다행의 맥락에서 발설되는 경우가 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다' 할 때의 '한숨'이 그것이다. 긴장이나 걱정이나 설움이 사라졌을 때, 우리는 한숨을 내쉰다.
그렇다면 한숨은 슬픈 사랑의 말이면서, 되돌아온 사랑의 말이기도 하다. 연인에게 차였을 때(경우에 따라선 피치 못할 사정으로 제 뜻에 반해 연인을 찼을 때), 사람들은 한숨을 쉰다.
그런데, 공교한 삶의 미로를 헤치고 뜻밖에 그 사랑이 되돌아왔을 때도, 사람들은 (안도의) 한숨을 쉰다. 앞서 인용한 한용운 시의 화자는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라고도 하는데, 그 재회가 마침내 이뤄질 때,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쉴 것이다.
사람은 슬플 때도 한숨을 쉬고, 그 슬픔이 갑자기 잦아들었을 때도 한숨을 쉰다. 호모 사피엔스는 신기한 동물이다. 이 대목에서 서양우화 하나가 떠오르는 건 자연스럽다.
사람이 똑같은 숨결(입김)로 사물을 데우기도 하고 식히기도 하는 걸 보고, 그 이중성에 놀란 반인반수의 삼림신(森林神) 사튀로스가 앞으로 인간과는 상종을 안 하겠다고 했다는 얘기 말이다.
묘한 것은, 몇몇 유럽어에서도 이런 표현법이 발견된다는 것이다. 예컨대 '한숨'에 해당하는 프랑스어 'soupir'나 영어 'sigh'는 우리말에서처럼 슬픔이나 한탄과 관련해 쓰는 것이 예사다.
그런데 이 언어들에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다'(프랑스어로는 soupirer de soulagement, 영어로는 sigh with relief)라는 표현이 있다. 그러니까 'soupir'나 'sigh'의 일차적 의미는 탄식이지만, 때론 그저 중립적으로 '큰 숨'을 뜻하기도 하는 것이다.
유럽어끼리 이런 표현법을 공유하고 있는 것은 한 쪽에서 다른 쪽으로 번역차용(베끼기)된 결과이기 쉽다. 그런데 우리말에도 그와 똑같은 표현이 있는 건 우연일까, 아니면 이것도 (일본어를 거쳐) 유럽어를 번역차용한 결과일까?
'안도의 한숨을 내쉬다'에 가까운 일본어 표현으로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안도(安堵)노 무네(胸)오 나데오로스'인데, 이 말은 직역하면 '안도의 가슴을 쓰다듬어 내리다'여서, 우리말이나 프랑스어, 영어와는 표현 방식이 다르다. 이 일본어 표현은 우리말 '가슴을 쓸어내리다'의 원적(原籍)인지도 모르겠다.
한자로 太息이라 쓰는 '후토이키'나 '오이키'가 우리말 '한숨'(큰 숨)에 해당하는 말일 텐데, 이 말들을 써서 안도감을 나타내는 표현이 있는지는 내 초급일본어로 알 도리가 없다. 일본어에 능한 독자께서 알려주셨으면 한다.
한숨은 슬픔의 말이면서 안도의 말이고, 깨어진 사랑의 말이면서 되찾은 사랑의 말이다. 한숨의 사랑은 모순의 사랑이고, 움직이는 사랑이다.
객원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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