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의 선창에 따라 "하늘천, 따지, 검을현, 누루황" 하고 소리쳤다. 불과 6, 7세 나이, 한글조차 채 깨우치기 전이었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특별한 풍경이 아니었다. '청학동'이 아니라도 마을마다 훈장 어른 한 두 분쯤은 계셨고, 농사일이 끝난 해거름이면 아이들을 대청마루로 불러들였다.
▲ '천자문 익히기'의 평생 효과
가르치는 방식도 단순했다. 그냥 외우게 했다. 양도 많지 않았다. 글자 모양과 정확한 뜻도 모른 채 무작정 하루 16자씩을 큰소리로 수없이 반복할 뿐이었다. 들고 간 <한석봉 천자문> 은 봐도 그만, 안 봐도 그만이었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같았다. 매일 다른 게 있다면 16자를 새로 배우고 나면 반드시 맨 처음 "하늘천'부터 다시 외우게 했다는 것이다. 중간에 한 자라도 빼먹거나 순서가 틀리면 회초리로 맞았다. 모두 한자도 막힘 없이 줄줄 외워야만 수업을 마쳤다. 한석봉>
온갖 과학적 방식과 다양한 교재가 판을 치는 요즘 눈으로 보면 무지막지하다. 그러나 천만의 말씀, 수 백년을 선조들이 지켜온 이 한자공부 방식의 위력은 실로 대단했다. 두 달이면 누구나 천자문을 처음부터 끝까지 한 자도 빼먹지 않고 마치 노래하듯 술술 외우게 된다. 조금씩 양을 늘려가면서 수 백번 반복한 철저한 복습 효과다. 자연스럽게 시간이 갈수록 외우는 글자수가 맞나 안 맞나 확인하기 위해 입만이 아닌 눈도 글자를 따라간다.
이렇게 외우기가 끝나고 나면 쓰기를 시작한다. 이번에는 하루에 8자씩. 물론 붓글씨다. 우선 변과 획수와 쓰는 순서부터 배우고 나서, 온 신경을 손끝에 모아 한 자 한 자 써나간다. 틀리거나 비뚤비뚤하면 다시 쓰고, 또 다시 쓰고. 그 다음에는 4글자씩 한꺼번에 쓴다. 그러는 사이 '손'이 저절로 글자 모양을 기억한다. 걸린 시간이라 해봐야 모두 합쳐 7개월이다.
어린시절 이렇게 배운 한자공부는 평생을 간다. 초등학교에 들어가자마자 그 힘을 발휘한다. 우리말의 70%가 한자어이기 때문이다. 천자문을 가르치며 "한자를 모르고 어찌 우리말을 알겠느냐"는 훈장님의 말씀이 실감이 난다. 낱말의 한자를 보면 자신도 모르게 '천자문'에서 외운 글자가 되살아 난다. 한자는 우리 말 이해에는 물론 언어의 품위와 의사 소통에도 큰 도움을 준다. 당연히 독서 태도에도 영향을 미친다. 한자를 모르면 뜻을 정확이 알지 못하고, 뜻을 모르니 책이 재미없고 어렵다. 신문에 아는 한자라도 나오면 기뻐서 열심히 읽어본다.
한글 전용주의자들은 한자를 자꾸 쓰면 순수한 우리말이 점점 사라져버린다고 주장한다. 과거 한자 보다 한글이 낮은 말이라 여겼을 때 이야기다. 지금은 반대로 한자를 몰라 갈수록 우리말 소통력이 약해지고 있다. 학교에서 한자가 사라지고, 덩달아 신문까지 한자를 팽개치면서 어떤 현상이 일어났나. '學科(학과)'를 학교라고, '문화(文化)'를 '文花'라고 쓴 서울대생이 있었는가 하면, 한 연구조사에 의하면 대학졸업생 10명 중 7명이 부모 이름을 한자로 쓰지 못한다.
편안한 컴퓨터 자판은 그나마 어린시절 천자문을 붓으로 썼던 한자세대의 '손'의 기억까지 앗아가 버렸다. 어느 회사 간부는 "요즘 젊은이들 아무리 영어가 유창하면 뭐해. 그것을 우리말로 제대로 옮기지를 못하는데" 라고 하소연 한다. 대기업들이 신입사원 채용 때 한자능력을 중시하겠다고 하는 밝힌 이유도 여기에 있다.
▲ 한자 공부는 우리말 학습
서울 강남교육청의 초등학교 한자공부 부활을 놓고 의견이 분분하다. 또 다른 사교육 조장이니, 한글도 제대로 깨우치지 못한 아이들의 언어관을 해칠 우려가 있다는 비판도 있다. 분명한 것은 한자어도 우리말이고, 한자는 그것을 올바르게 사용하고 이해하기 위한 수단이지 외국어가 아니란 사실이다. 일본은 지금도 소학교에서 학년 단계별로 모두 1,300자 정도의 한자를 가르친다. 서도(書道)시간까지 따로 두고 있다. 모든 말이나 글이 그렇듯 한자 역시 가능하면 어릴 때 배우고 익혀야 쉽고 오래 간다. 그것도 할아버지에게 '천자문'을 배우던 그 옛날처럼 가장 단순한 방식으로.
이대현 논설위원 leed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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