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탕, 그것도 여탕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질까? 사우나 도크에 우르르 몰려 앉은 여인들은 대체 무슨 얘기를 나누며 5분여, 10분여의 시간을 보낼까 말이다.
지난 화요일 연휴를 보내고 흐트러진 컨디션을 회복하려 목욕탕을 찾았을 때의 일이다. 40도에 육박하는 고온 사우나 도크 안에는 이미 아주머니 서너 분 모여 앉아 담소를 즐기고 계셨다. 나는 가만가만 까치발로 들어가 맨 뒤에 앉았는데...
■ 임진강 참게와 서해안 꽃게
사우나 안에서는 간장게장 이야기가 한창이었다. 한 분이 연휴에 서해안에 있는 무슨 항구를 다녀오는 길에 꽃게를 1만5,000원 주고 이만큼 가져오셨다고 화제를 풀었고. 봄에 제철인 암게에 비해 요새 많이 잡히는 수게는 알이 없어 그냥 게장이나 담그는 것이 낫다 하신다.
"맞아, 알 안 찬 수게는 그냥 간장에 삭힌 맛으로 쭉 빠는 게 낫지. 그래도 가으내 잘 먹잖아." 모두들 공감하는 분위기. 이때부터 각자의 간장게장 담그는 비결이 쏟아져 나온다.
간장이 너무 짜지는 것을 막기 위해 사이다와 맛술을 섞는다, 가시오가피를 넣는다, 매실을 몇 알 띄운다, 레몬즙을 짜 넣고 레몬 껍질까지 띄워 삭힌다, 정향과 팔각 향을 넣는다….
이쯤에서 나이 가장 지긋하신 어머님이 한말씀 하신다. 꽃게장은 옛날에 먹지도 않았다, 참게로 담가 오래 삭혀야 간장 게장의 진미를 알 수 있다고. 그렇지 않아도 임진강 어귀에 참게가 많이 잡히기 시작하는 철인데, 내 두 귀가 쫑긋해졌다.
"꽃게가 담그기 쉽고, 젊은 사람들은 인내심이 없어서 금방 담가 금방 먹는 맛이 좋지." 어머님 말씀으로는, 딱지가 두꺼운 참게장은 간장을 달이기도 몇 번을 더하게 되고, 삭히는 날수도 달이 걸리지만 연중 두고두고 먹을 수 있으니 발효 음식의 참맛을 보기에는 그만이라는 것.
실제로 등껍데기가 두꺼운 참게에는 상대적으로 많은 양의 키토산이 함유되어 있으니, 몇 달에 걸쳐 우러나는 영양분 듬뿍 간장을 밥에 톡톡 비벼 머슴밥으로 먹으면 연말연시의 헛헛한 마음이 좀 풀리지 않을까 생각한다.
가으내 담그면 딱 해 바뀔 때 먹게 되니 말이다. 사이다나 맛술로 묽게 만든 간장을 쓰는 꽃게보다는 진하게 간장 맛을 뽑아야 하는 참게. 조선간장, 일반 간장 비율 잘 섞고 불에 달인 후 소주를 넣으면 농도가 딱 좋다.
■ 민물게
흔히 '상하이 크랩'이라 불리는 중국의 고급 민물게. 이제 막 제철이 시작된다. 지금부터 11월까지, 딤섬처럼 곱게 쪄 낸 상하이 크랩을 먹을 수 있다. 국내의 몇몇 중식당에서도 상하이 크랩을 공수해 선을 뵈고 있지만, 사실 먹을 것은 별로 없는 편. 가격에 비해 가뜩이나 살이 모자란 민물게라서 아무래도 산지가 아니면 권하기 어렵다.
민물게 하니까 우리 집 별미 '게지짐'이 생각난다. 된장 풀어 만드는 엄마만의 양념에서 정성껏 지져낸(사실은 졸인) 음식이다. "게 지져 놨어요"라고 전갈을 돌리면 할아버지 할머니, 작은 아버지 내외분이 한 걸음에 달려 오셨었다.
어른들에게 한 개씩 배당되는 게딱지. 게의 등껍데기 부분을 말하는데, 여기에 가득 찬 내장과 뭉근하게 지져지면서 배어들어간 된장 양념이 일품. 여기에 밥을 밀어 넣어 조물조물 비비면 오묘한 맛이 난다.
어렸을 적 할아버지, 아버지, 작은 아버지가 아이 손바닥만한 게딱지를 보물처럼 꽉 쥐고 밥을 비벼 드시는 모습이 너무 재미있었다. 그때만 해도 민물 게와 된장이 이루는 맛을 알 턱이 없어서 몸집 큰 남자 어른들이 소심하게 웅크린 자세로 게딱지 드시는 모습이 웃기다고 깔깔대기만 했다.
민물게는 바다 가까운 논두렁 같은 데에 살다가 가을이 되면 알을 낳으러 바다로 내려 가는데, 옛날에는 게들이 바다로 가는 길목을 막아 몽땅 잡곤 했다. 민물게 좋아하는 서울 사람들인 외갓집 식구들 입맛 때문에, 외할머니는 늘 민물게로 게장을 담갔다는데, 아버지와 겸상한 큰아들만 먹을 수 있는 귀하디 귀한 메뉴였단다.
게딱지를 부자가 나눠 먹고, 혹시 남으면 딸들이 가져 와 남은 간장 곁들여가며 마지막 한 입까지 살뜰히 먹었다고. 지금은 '부드러운 아버지'가 이상적인 상(象)이 되어, 또 아들과 딸을 덜 구별하는 시대가 되어 아들만 게딱지를 주는 집은 아마 없을 테지만.
게다가 민물게가 폐디스토마의 중간 숙주라, 끓여서 식힌 간장에 담가 삭히는 조리법이 위험하다는 것이 일반 상식이 되면서부터 민물게 다루는 일이 조심스러워졌다. 이래저래 나 같은 신세대 주부들은 꽃게장이 먹기도, 만들기도 마음 편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 게 Vs 간장
자, 그러면 이상적인 게장 맛이란 과연 뭘까? 흔히들 '밥도둑'이라 이름 붙은 것들은 짠 맛이 우위를 점하지만, 사실 짜기만 하면 밥도둑이 될 수 없다. '밥도둑'의 대표 선수인 장아찌만 봐도 그렇다.
매실의 새콤달콤한 맛에, 굴비의 고유한 고소함에, 더덕이 뿜는 쌉싸래한 단향에 짠 맛이 더해?맛있는 것이다. 100% 짜다고 밥도둑이라 불릴 것이면 소금을 찍어 맨밥이랑 먹고, 간장을 솥으로 끓여 찌개라 할 것이다.
장황한 설(說) 뒤에 하고픈 말은, 진짜 맛있는 간장게장은 짜기만 한 맛이 아니라는 사실. 게가 가진 고유의 물 맛, 저 깊은 땅 맛, 은은한 살 맛, 내장의 단 맛, 알의 고소한 맛, 껍질에서 우러나는 우유같이 고소한 맛이 모두 '간장'의 지휘 아래 어울려야 맛있는 간장게장이다.
그 오묘한 맛의 지휘자가 간장이다 보니, 사실 간장 게장 맛의 반은 간장에 있다고 봐도 좋다. 아무리 질 좋은 게로 담가도 간장 맛이 파이면, 엉성한 맛으로 마무리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맛있는 간장게장을 먹고 싶을 때는, 장 맛으로 소문난 집을 찾아간다.
가령 서울 인사동의 '신일식당(02-739-5548)'. 제대로 된 전라도 밥상만 십오년 남짓 차려 내고 있는 집이다. 순창에서 공수해 오는 각종 장류와 장아찌 등을 판매도 하고 있는데, 그 맛이 궁금하면 정식을 주문하면 된다.
밥과 함께 먹는 간장게장. 이 집의 간장게장을 맛보면 역시 간장게장 맛의 반은 장맛이라는 결론이 더 확실해진다. 은은하고 맑은 간장. 그 간장은 게 맛을 더욱 빛나게 해주는, 일종의 소스 역할을 한다.
절대 게 맛에 앞서는 일 없고, 그렇다고 밍밍하게 뒤로 내빼는 일도 없다. 간장게장이 임금님께 진상하던 메뉴였다면, 그 진상하던 맛은 이런 게 아닐까 싶다.
미식의 교과서로 통하는 전통 프랑스 요리법에 비춰 보아도 간장게장은 주재료의 맛이 오롯이 살아있으면서 맛이 딱 맞는 소스를 곁들인 요리인지라 맛은 재래음식이면서도 그 구성만큼은 국제적, 현대적이다.
주말에 꽃게 사러 서해에 다녀 와도 좋고, 임진강 주변으로 달려가 참게 맛을 봐도 좋고, 잘 아는 밥집의 구수한 장맛으로 대신하여도 좋겠다. 은행나무가 노래지면서 쓸쓸한 마음에 기운이 들 것이니.
박재은ㆍ음식 에세이 <밥 시> 저자 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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