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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은행(銀杏) 도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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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은행(銀杏) 도둑

입력
2008.09.18 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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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더위가 맹위를 떨치고 있다. 추석도 지났으니 선선한 바람이 불 법도 한데, 등줄기에서 땀이 마를 새가 없다. 그래도 계절의 바뀜은 거스를 수 없는 자연의 섭리. 거리 곳곳은 성큼 다가오지 않는 가을에 애가 타는 이들이 서둘러 '가을 맛'을 보기 위해 내는 소리들로 요란하다. 탁, 탁, 탁. 은행나무 때리는 소리다. 어느덧 도심의 가을 풍경화가 돼버린 가로변 은행나무 열매 서리. 불법이라는 사실을 아는지 은행 서리는 단속과 주위의 시선을 피해 주로 밤과 새벽에 이뤄진다. 광주리나 가방을 들고 서리에 열심인 이들은 대부분 노인들이다.

▦프라이팬에 은행을 올려놓고 구우면 노릿노릿 고소한 냄새가 난다. 열매가 으깨졌을 때 나는 악취와는 영 딴판이다. 주당들의 안주로는 그만이다. 그뿐인가. 신선로나 갈비찜, 정과, 단자병 같은 정통 음식에도 잘 어울린다. 건강에도 좋다. 폐 기능을 보완해주는 효과가 뛰어나 결핵 환자나 천식 환자가 장기간 복용하면 기침이 없어지고 가래가 줄어든다고 한다. 그러니 노인들이 은행 서리에 열중할 수밖에. 약간의 독성 성분이 있는 게 흠이라면 흠이다. 은행 껍질을 까다 피부염이 생길 수 있고, 너무 많이 먹으면 구토 설사 증세가 나타날 수 있다.

▦광주와 부산에서 허가 없이 가로변 은행나무에서 은행을 따던 노인들이 잇따라 불구속 입건됐다. 그런데 혐의가 무시무시하다. 특수절도다. 특수절도에 대한 형법의 규정은 이렇다. '야간에 문호 또는 장벽, 기타 건조물의 일부를 손괴하거나 2인 이상이 합동해서 타인의 재물을 절취한'범죄다. 1년 이상 10년 이하의 징역형에 처해질 수 있다. 심야에 2명 이상의 노인들이 장대를 휘둘러 은행나무 가지를 때리는 방법으로 공공의 재산인 은행을 훔쳤기 때문에 특수절도 혐의를 적용했다는 것인데, 그게 그렇게 중한 범죄일까. 참 야박하다.

▦경찰에 비해 경북 구미시는 참 지혜롭다. 아무리 단속해도 은행 서리가 근절되지 않자 아예 은행을 따가라고 권장하고 나섰다. 구미 시민이면 누구나 읍ㆍ면ㆍ동사무소에 신고를 한 뒤 교통사고 및 은행나무 훼손을 막기 위한 사전 채취 교육을 받으면 마음껏 열매를 딸 수 있다. 시민들은 열매를 따서 노인정이나 양로원에 드리는 훈훈함도 잊지 않는다고 한다. 이렇게 발상만 바꾸면 모든 이들이 행복해질 수 있는데 특수절도라니…. 서울에서도 하루쯤 날을 잡아 전 시민들이 공인된 '은행 도둑'이 돼보는 행사를 열면 참 좋을 것 같다.

황상진 논설위원 april@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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