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일본이 재기해 세계 제 2의 경제 대국이 될 줄은 아무도 예측 못했다. 오일파동 전에는 작은 일본 자동차들은 하나의 장난감같이 취급 받아 주로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학생들에게 선물로 사주는 정도였다. 그 뒤 일본은 카메라, 스테레오 오디오 등을 앞세워 놀라운 속도로 미국 시장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오일파동이 터지자 도요타, 닛산, 닷선등의 미니 자동차들이 불티나게 팔려 도요타는 오늘날 세계를 정복한 자동차메이커로 거듭 날 수 있었다.
일본은 198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세계 경제대국으로 부상했다. 일본의 경영기술을 배우기 위한 IST란 프로그램이 미국 내에서도 유행해 기업체들은 물론 관공서까지 이 프로그램에 참가해 세미나를 하기도 했다.
1990년대에는 완전히 세계 시장을 장악, 일본 상품이 진출하지 않은 나라가 거의 없게 됐다. 아프리카에 여행을 가 아프리카 토착민들의 예술품을 잔뜩 사 들고 미국으로 돌아와 보니 이 모든 게 거의 다 made-in-Japan 이었다는 내용의 기사가 미국 신문에 톱뉴스로 나올 정도였다. 일본은 나라 자체가 무역회사 역할을 하기 때문에 미국에선 일본을 Japan Inc. 라고 불렀었다
그 당시 일어난 한 사건은 일본의 기업문화를 극적으로 보여주면서 유명해졌다. 마쓰다 자동차를 싣고 일본을 떠나 미국으로 향하던 수송선에 이상이 생겨 바닷물이 배에 스며들었다. 이 사고로 물에 잠긴 수백대의 자동차에 녹이 슬어 심각한 손상을 입게 되자 책임을 통감한 배의 선장이 할복자살을 했다.
이 사건은 미국의 기업들에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아니 아무리 책임감이 강하다 해도 스스로 목숨을 끊다니, 도대체 기업인들이 어떤 방법으로 경영을 하기에 그 직원들이 회사에 누를 끼쳤다며 자살을 할까. 돈 몇 백 달러를 더 준다고 회사를 옮기는 미국의 직장인들과 무엇이 그토록 다른 것인가. 이 일을 계기로 일본식 경영에 대한 미국 내 관심은 더욱 높아졌다.
IST프로그램은 일본식 무사도인 일종의 사무라이 정신과 비슷하지만 3대가 같은 회사에서 일하고 아이들 교육비까지 회사가 책임지는 일본적 문화는 미국에는 제대로 접목되지 못한 채 쇠퇴했다.
내가 초선 의원이었을 때 많은 지역구 주민들이 제기한 불평 가운데 하나는 하와이에 대한 것이었다. 하와이 여행을 할 때마다 현지 호텔을 온통 일본인들이 사들여서 하와이를 완전히 일본의 영토로 만들었다는 느낌을 받게 되는데 미국이 2차대전에서 일본에 승리한 게 맞는가라는 의문이 들 정도다. 이는 일본이 2차대전에서 패했지만 이제 야금야금 미국을 돈으로 사는 게 아니냐는 얘기로 이어진다.
하와이 뿐만이 아니다. 일본인들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페블 비치도 시가보다 훨씬 비싼 가격에 구입했다. 로스앤젤레스에서 가장 유명한 역사적 건물인 빌트모어 호텔, 전통적으로 할리우드 배우들이 주로 출몰하는 리비에라 컨트리 클럽, 뉴욕의 상징인 록펠로 센터 등 미국의 자존심이 서린 건물들도 아주 비싸게 사들였다. 이러다 보니 미국인들의 일본에 대한 반감은 커져 갈 수밖에 없었다.
미 의회에선 이 때문에 중앙은행격인 연방준비제도위원회 (FRB)의 폴 볼커 이사장을 불러 청문회까지 열었다.“일본이 부동산을 마구 매입, 미국의 자존심을 자극하는 것을 대책 없이 바라만 보고 있을 것인가. 자유시장 원리상 법으로 어떻게 할 수는 없지만, 금융경제 정책을 통해 국제법에 어긋나지 않는 범위 안에서 견제할 방법은 없는가”하는 질문들이 쏟아졌다. 볼커 이사장이 대답은 “좀 시간을 두고 지켜봐달라”는 것이었다.
이후 FRB는 연방 이자율을 0.25% 인상한 데 이어 이후 거의 여섯번 가까이 이자율을 잇따라 올렸다. 그 바람에 부동산 시장이 침체, 일본인 부동산 투자가들이 제일 먼저 직격탄을 맞았다. 70%를 미국 은행에서 융자 받고, 나머지 30% 직접 투자는 일본 은행이 보증한 투자여서 별안간 닥친 높은 이자율 때문에 부동산 가격이 20% 급락했다. 미국 은행은 그 차이 20%를 보전하라며 일본 투자가들에게 현금을 요구하기도 했다.
한 부동산을 담보로 다른 부동산 2~3개를 문어발식으로 매입한 일본인들은 이 현금 요구를 이행하지 못했다. 결국 일본인들은 미국 내 부동산을 구입 가격의 3분의2 정도인 헐값에 되팔아야 했고 그 바람에 일본은 이후 20년 동안 지독한 경기침체에 빠졌다.
나는 그 때 폴 볼커 이사장이 “지켜봐달라”며 자신있어 하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결국 일본은 에너지 위기 때 인기를 끈 소형차와 라디오, 텔레비전, 카메라 등을 팔아 큰 돈을 벌었지만 미국을 너무 얕보고 섣불리 얕은 수를 쓰는 바람에 부동산 구매정책에서 완전히 실패했다.
초선의원 시절 중소기업위원회에 속해 있을 때 일이다. 로스앤젤레스에서 일어난 4ㆍ29 흑인 폭동으로 손해를 본 한국 상인들이 중소기업청에 융자를 신청했는데 백인들은 다 승인됐는데 한인들만 승인이 나지 않았다며 인종차별을 주장했다. 나도 화가 치밀어 중소기업청 책임자를 내 사무실에 불러 물어봤다. 그의 대답은 한인 상가들의 과거 3년 간 세금보고서를 보면 3년을 계속 손해만 본 것으로 돼 있기 때문에 이런 사업체에 융자를 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미국은 세금납부서에 그 내용이 틀림없다고 본인이 사인만 하면 세무서는 이를 그대로 존중하고 손해를 봤다는 금액을 환불해준다. 역으로 사업을 통해 돈을 벌었으면 마땅히 세금을 내야 한다.
한인 상인들이 세금을 제대로 냈더라면 중소기업청에서 막대한 현금을 보조받고 3~5년간 세금 혜택도 받을 수 있었다. 또 이자가 거의 없는 싼 금리로 융자를 받아 새로 사업을 시작할 수도 있었을텐데 세금보고서 부실 신고로 손해가 막심해진 것이다.
당시 만나본 한국 상인들은“아니 세금을 다 내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며 같은 동포인 내가 자기들을 도와주지 않고 미국 정부 편을 든다면서 섭섭해 하면서 더러는 화를 냈다. 더욱이 이들은 중소기업위원회 소속인 내가 나서서 중소기업청에 전화 한번만 하면 문제가 다 해결될 것으로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 이때 뭐라고 더 이상 설명할 수가 없어 등 뒤로 쏟아지는 불평을 들으며 쓸쓸하게 사무실을 나왔던 기억이 있다.
아침 지하철 훈남~알고보니[2585+무선인터넷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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