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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주어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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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주어진 것

입력
2008.09.17 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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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대통령 선거가 한창 열이 올랐다. 민주당 오바마 후보의 화려한 연설과 참신성이 시선을 끌어 모으더니, 공화당 매케인 후보가 부통령 후보로 느닷없이 사십 대의 페일린이라는 여성 주지사를 지명하고 난 뒤 페일린 바람이 불고 있는 것 같다. 심지어는 공화당에서 대통령 후보는 보이지 않고 부통령 후보만 보인다는 기사도 있다.

페일린 부통령 후보는 여러 가지 면에서 관심을 끌지만 고등학교 다니는 딸이 임신 중이라는 사실이 당연 관심을 끌고 있다. 이를 당당하게 밝히고 아버지가 될 어린 남자도 공개석상에 모습을 보였다. 남의 나라 풍습이니 우리가 뭐라고 할 일은 없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한 오마바 후보의 발언이 돋보인다. 페일린 부통령 후보의 가정 문제에 대하여 루머를 퍼뜨리거나 이슈화하려는 민주당 선거 캠프 사람이 생기면 즉각 해고하겠다고 밝히고 나섰다고 한다. 개인의 가정사는 지극히 사적인 것이라는 이유이다. 신선하다.

이 기사와 대비되는 풍경이 우리나라에 있다. 근자에 새로 임명된 장관을 검증하는 국회에서 장관의 아버지의 직업이 무엇이었느냐를 따져 묻는 장면이 나오고 당사자는 이 질문 앞에서 쩔쩔맸다는 기사이다. 생각해 보니 같은 풍경이 또 있었다. 과거 정부 시절 집권당 당의장이 아버지가 가졌던 직업으로 인하여 자리를 물러난 사건이 떠오른다.

이런 이야기의 백미는 노 무현 대통령 후보의 발언이다. "그럼, 사랑하는 처를 바꾸라는 말입니까?" 우리는 모두 이 말을 잘 기억한다. 본인도 이 한 마디의 촌철살인으로 색깔 논쟁을 잠재웠다. 지금 생각해 봐도 탁월한 정치적 감각이다.

필자는 왜 같은 발언이 거듭 나오지 않는지 궁금하다. 왜 장관은 "그럼 아버지를 바꾸란 말입니까?" 하고 되묻지 못했을까?

일본 제국이 조선을 점령한 것은 우리 선대의 불행한 과거이고, 이는 역사적 사실이다. 더 이상 우리가 지금 그 사실을 고치거나 망각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그 역사적 상처를 우리끼리 들쑤시는 것은 옳지 못하다. 우리 사회가 아직 성숙한 개방사회가 되지 않았다는 증좌이며, 우리 선대의 치욕을 아직도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명이다. 더구나 가족의 역사에 있어서랴.

어느 경우에도, 주어진 것은 자랑도 아니고 부끄러운 것도 아니다. 자식에게 있어서 아버지는 '주어진 것'이다. 아버지를 바꿀 수도 없고, 아버지에게 책임을 물을 수도 없다. 왜 어떤 아버지를 만나게 되었느냐고 당사자에게 물어 볼 수도 없지 않는가? 자식도 아버지도 서로를 선택하여 부자지간이 되지는 않았다. 하늘이 그렇게 만들었을 뿐이다. 그래서 부자지간을 천륜이라고 하지 않는가?

문제는 그 주어진 환경 속에서 자기가 어떤 종류의 노력을 얼마나 하여 오늘에 이르렀는가 하는 것이다. 그 결과가 어떤 자리에 오를 만하면 오를 것이요, 그렇지 못하면 작은 자리에 만족하고 살 뿐이다. 얼마든지 물어도 좋은 것은 주어진 것을 떨쳐내기 위하여 혹은 갈고 닦기 위하여 어떤 노력을 하였느냐 하는 것이지 주어진 것이 무엇이었느냐 하는 질문은 아니다.

미국 대통령 선거는 앞으로 긴 시간 동안 진행될 것이다. 오바마 진영의 성숙함이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 주어진 것과 노력하여 얻은 것을 잘 구분하는 수준에까지 이르렀다면 외국인의 입장에서는 매우 흥미로운 구경거리이겠고, 우리나라 정치하는 분들로서도 배울 점이 없지 않은 선거 장면이라 할 수 있겠다. 이제 정말 과거사 이야기 혹은 돌아가신 조상 들춰내기가 정치의 이슈가 아닌 나라가 되었으면 좋겠다.

김연신 한국선박운용(주)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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