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가경정예산안 처리 무산 사태로 18대 첫 정기국회는 '시계 0' 상태가 돼버렸다. 한나라당의 강행 처리 시도에 대해 민주당이 강력 반발하면서 가까스로 정상화한 국회가 다시 전장으로 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기 때문이다. 국정감사와 내년도 본예산 처리 등 정기국회 의사일정 전반에 악영향을 줄 가능성이 크다.
당장 추경안 처리 전망부터가 불투명하다. 한나라당은 추석 연휴 이후 내주 다시 처리한다는 입장이지만 민주당은 원점에서부터 재검토해야 한다고 맞서고 있다. 박희태 한나라당 대표는 12일 "추석 뒤 민주당이 태도를 고치지 않는 한 자유선진당과 함께 같이 (추경안 처리를) 해 나가겠다"고 분명히 했다. 그러나 정세균 민주당 대표는 "민주당이 양보해 공기업 보조금에 대해 합의까지 했는데도 일방적 날치기를 할 수 있느냐"고 강력 비난하며 "추경안은 원점에서 재논의해 처리해야 한다"는 입장을 강조했다.
이번 사태로 인해 감정의 골이 벌어질 대로 벌어진 데다 추경안 자체에 대한 입장 차이도 워낙 커 추석 후에도 합의 처리는 쉽지 않아 보인다. 결국 여당의 재차 강행 처리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한나라당 홍준표 원내대표 등 원내지도부가 사의를 표명한 상태여서 처리를 강행할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더 큰 문제는 국회 운영 전반이다. 이번 사태로 민주당은 "내년 예산안 처리 등 앞으로의 국회 운영에 협조할 수 없다"고 강력 반발하고 있다. 민주당은 여당의 대국민 사과와 재발 방지 약속, 이한구 예결특위위원장 즉각 사퇴 등을 요구하며 여당을 몰아세웠다. 그렇다고 한나라당이 민주당의 요구를 들어 줄 것 같지도 않다. 서로 물러설 기미가 없는 것이다. 만약 추석 이후 한나라당이 추경안을 단독 통과시킨다면 여야는 앞으로 사사건건 충돌해 정국경색이 지속될 수도 있다. 경우에 따라 물리적 충돌이 벌어질 개연성도 있다.
앞서 이날 새벽 한나라당의 추경안 본회의 강행 처리 시도가 무산된 것은 예결위의 의결 정족수 부족 논란이 큰 이유였다. 여당은 민주당을 빼고 처리하기로 하고 0시6분께 예결위 전체회의에서 추경안을 통과시켰다. 당시 이한구 위원장은 참석 의원 수를 예결위 전체 의원 50명 중 의결 정족수가 넘는 26명으로 계산해 의사봉을 두드렸다.
그러나 한나라당이 회의에 불참한 황영철 의원 대신, 박준선 의원을 참석토록 하는 사보임 서류를 0시5분께 국회 의사과에 접수했는데 사보임이 공식 확정된 시점은 추경안 통과시각을 넘긴 0시32분께인 것으로 뒤늦게 확인되면서 논란이 빚어졌다.
민주당이 법적 문제를 제기했고, 한나라당은 이 논란 때문에 결국 본회의 통과를 포기해야 했다. 한나라당이 처리를 결심하고도 자당 소속 예결위원 29명 중 7명이나 불참하는 한심한 상황을 연출, 스스로 정족수 논란을 자초한 측면이 있다.
아울러 김형오 국회의장의 직권상정 거부도 한몫을 했다. 예결위의 법적 논란을 없애려면 김 의장이 추경안을 직권상정해 통과시키면 되는 상황이었지만 김 의장은 한나라당의 거듭된 요구에도 나쁜 선례를 피한다는 차원에서 "야당과 합의해 오라"며 의사봉을 잡지 않았다.
정녹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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