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의 비밀을 향한 빛 한 줄기가 10일 발사됐다. 인류의 호기심은 빛의 속도로 순식간에 27㎞ 원둘레를 한바퀴 돌았다. 세계의 물리학자들은 환호했고 인류는 지성의 탑에 또 하나의 벽돌을 쌓았다.
스위스 제네바에 본부를 둔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는 10일 오후 4시39분(한국시간) 프랑스와 스위스 국경에 걸쳐 지하 100m에 지어진 거대강입자충돌가속기(LHC)에서 양성자 빔을 발사, 27km의 가속기를 한바퀴 도는 실험에 처음으로 성공했다. 린 에번스 LHC 프로젝트 리더는 "첫 수소 양성자 빔이 성공적으로 발사됐다"며 LHC의 순조로운 가동을 확인했다.
직선의 가속기로부터 원형의 LHC를 향해 머리카락 굵기의 양성자 빔을 쏜 뒤 자석으로 양성자의 방향을 틀어 원둘레 27㎞를 시계 방향으로 한바퀴 도는 성능 시험이었다. LHC는 이후 반시계 방향으로 빔을 쏘고 최종적으로 연말께부터 양쪽 방향으로 양성자를 쏘아 광속의 99.9999991%로 가속, 정면 충돌케 하는 본격 실험을 벌인다.
기대하는 실험결과는 1,2년 뒤에야 나올 예정이지만 세계 최대의 이번 실험 프로젝트의 첫 출발에 과학계는 한껏 설레고 있다. 성균관대 물리학과 최영일 교수는 "LHC를 짓는 데만 14년이 걸렸고 9조원 가량이 들었다. LHC 가동은 물리학계에서 20년 만에 한번 있을까 말까 한 일"이라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LHC의 실험에는 한국 물리학자 60여명을 포함, 80개국 9,000여명의 세계 물리학자들이 참여한다.
LHC는 1980년대에 구상되고 1994년 사업에 착수한 거대과학의 전형. 세계에서 가장 크고, 입자를 가장 빨리 가속시킬 수 있는 가속기다. 초전도를 유지하기 위해 60톤의 액체 헬륨을 쏟아부은 내부 온도는 영하 271.3도, 달보다 10배 희박한 진공 환경이며, 입자끼리 충돌할 경우 태양의 중심온도보다 10만배나 뜨겁게 달궈진다.
이처럼 '무식하다'고까지 일컬어지는 물리학계의 대역사(大役事)의 목적은 질량의 근원으로 여겨지는 힉스 입자를 비롯해 암흑물질과 끈이론의 향방을 가를 초대칭입자를 관측하고 빅뱅 직후 상태를 재현하는 것 등이다.
이를 통해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와 물질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설명하는 표준모형과, 우주론의 '잃어버린 고리'를 찾으려 하고 있다. LHC에서 힉스와 초대칭입자가 발견될 경우 물리학은 표준모형을 완성하고 끈이론과 같은 새로운 이론으로 나아가는 중대한 전환점을 맞게 된다.
반대로 만에 하나 힉스 입자가 발견되지 않는다면 물리학 연구는 한동안 방향을 잃고 헤맬 수도 있다. 블랙홀 연구로 유명한 영국의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은 9일 "힉스 입자를 발견하지 못한다면 새로운 사고가 필요하다는 점에서 더 신나는 일이 될 것"이라며 "발견 못한다에 100달러를 걸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호킹은 평소 힉스의 존재를 처음 주장한 영국의 물리학자 피터 힉스를 폄하하곤 했는데, 현재 노벨상에 더욱 근접한 학자는 호킹이 아닌 힉스가 되고 있다.
LHC 가동을 앞두고 실험중 생성되는 아주 작은 블랙홀이 지구를 삼켜버릴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심각하게 제기되기도 했다. 3월 미국에서는 LHC 실험을 중단해달라는 소송이 제기됐고 블랙홀이 팽창해 파국을 맞는 동영상이 인터넷을 타고 전세계에 유포되기도 했다. 하지만 물리학자들은 "실험중 인공적으로 생기는 블랙홀은 자연적으로 수없이 생기고 사라졌던 것으로 전혀 위험하지 않다"고 일축했다. CERN측은 LHC 실험의 안전성 문제를 과학적으로 꼼꼼히 점검한 보고서를 최근 공개했다.
■ 용어설명
▦양성자= 중성자와 함께 원자의 중심핵을 이루는 구성성분 중 하나. 전기적으로 양성이어서 자석으로 속도와 방향을 제어할 수 있다.
▦힉스= 1964년 영국의 피터 힉스가 존재를 예언한 입자로 근본입자(물질을 구성하는 기본 단위) 중 유일하게 관측되지 않았다. 우주 발생 초기 근본입자와 힘이 통합돼 있었다는 대통일 이론(GUT)에 따르면 입자들의 질량이 없어야 하지만, 실제로는 질량이 존재한다. 이 모순을 메우는 것이 힉스다. 흔히 설탕시럽에 빠지면 시럽이 묻어 무거워지듯이 입자들이 힉스와 상호작용해 질량을 갖게 된다고 일컬어진다.
▦충돌가속기= 입자를 거의 빛의 속도에 가깝게 가속시켜 맞부딪히는 물리학 실험장치. 가속기가 클수록 입자의 속도를 빠르게 할 수 있고, 충돌에너지가 클수록 질량이 큰 입자가 생성된다. 힉스는 양성자 질량의 100~200배로 추정돼 기존의 가속기로는 관측되지 않았다.
김희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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