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걷지도 못하던 우리 아이가 승마선수 꿈꿔요"균형감각 떨어져 하루에도 수십번 넘어지고 다치고말에 올라타 균형 잡으려 움직이니 근육에 힘 생겨이젠 혼자 계단 오르고 점프도… 자신감은 더 큰 수확
떨고 있었다. 주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어렵사리 조랑말에 올라타기는 했지만, 일곱 살배기 여자 아이에게 말 잔등은 영 불안해 보였다.
"이제 '만세' 한 번 크게 외치고 열까지 세는 거야. 자, 시작해볼까? 천천히 앞을 보면서 허리는 펴고 배에 힘 좀 더 주고, 알았지?" 숙련된 재활승마 치료사의 친절한 설명에 이어 일곱 살배기의 여리고 가느다란 목소리가 뒤따랐다. "마~안세, 하아 나, 두우 울, 세엣…."
경기 군포시에 있는 삼성전자 승마단 내 실내경마장. 태어나면서부터 뇌성마비를 앓아 온 권민정(7)양이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재활승마 치료를 받고 있다. 민정이는 곧 초등학교에 입학할 나이지만,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똑바로 걷기가 힘들다. 균형 감각이 떨어지는 '운동 실조형 뇌성마비'를 앓고 있기 때문이다.
어머니 이주연(32)씨는 민정이가 자라면서 겪었던 일들을 떠올릴 때마다 절로 몸서리를 친다. 제대로 걷지를 못해 넘어지고 구르기를 하루에도 수 십번. 무릎이 까지고 코피가 나는 것도 다반사였다. 실제 이곳 저곳 멍이 든 데다 온 몸이 상처 투성이여서 보기에도 안쓰럽다.
운동 실조형 뇌성마비는 서서 걷는 것은 물론, 일상 생활에서의 동작 수행 능력까지도 떨어뜨린다. 연필을 잡거나 밥을 먹기 위해 숟가락을 드는 것조차 버거울 수밖에 없다. 마음대로 몸을 움직일 수 없다 보니, 갈수록 자신감아 떨어지고 또래 친구들과 어울리기도 쉽지 않다. 외부인들에게서 스스로를 가두면서 대인 기피증까지 생겨 해맑은 웃음도 사라졌다.
"한창 먹고 웃으면서 열심히 뛰어 놀 나이에 행동 반경이 축소되다 보니 아이가 심리적으로 불안해지고 밝았던 성격도 날카로워지기 시작했어요. 물론 다른 아이들처럼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도 어려웠습니다."
이씨는 민정이를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 이른바 '용하다'는 곳을 찾아 전국 방방곡곡을 돌며 치료에 열중했다. 하지만 민정이의 상태는 호전되는 않았고, 오히려 아이와 함께 스트레스만 더 쌓여 갔다.
그랬던 민정이가 올해 3월부터 다시 웃음을 찾기 시작했다. 삼성서울병원에서 물리치료를 받던 중 담당의사의 소개로 삼성전자 승마단을 만난 것이다. 하지만 겁 많고 산만했던 민정이가 조랑말과 친해지기는 쉽지 않았다.
"민정이는 다른 아이들과는 좀 달랐어요. 무서움을 많이 타는데다 성격도 내성적이었거든요. 승마를 하기엔 그다지 좋은 성격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민정이가 말을 탈 때는 주변 사람들이 많이 긴장했어요." 민정이의 치료를 돕고 있는 재활승마 치료사 신혜연(28)씨의 설명이다.
재활승마 치료는 30분간 진행된다. 재활승마 치료사가 기본적인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리더(말을 앞장서서 끌어주는 사람)와 사이드 워커(말을 타는 아동을 보조해 곁에서 걸어주는 사람)가 말 잔등에 탄 뇌성마비 아동을 돕는다.
말의 움직임은 사람이 걸을 때와 가장 비슷하다고 한다. "말을 타고 있으면 마치 사람이 걸을 때와 흡사하게 신체 근육과 신경이 자극돼 지체장애 어린이의 재활에 큰 도움이 됩니다."
6개월 동안 정성스럽게 재활승마 치료를 진행한 결과, 민정이에게 조금씩 변화가 나타났다. '치료'보다는 '놀이'라는 느낌을 주는 재활승마에서 그 동안 경험하지 못했던 '움직이는 재미'를 느꼈기 때문일까. 효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신체 성장은 물론, 독립심과 집중력, 자신감 등이 몰라보게 나아졌다.
우선 신체 장애가 크게 개선됐다. 말 위에서 균형을 잡으려다 보니, 자연스럽게 평소 잘 쓰지 않던 허리와 다리 근육을 사용하게 되면서 하체 힘이 강해졌다. 사이드 워커의 도움을 받아야만 잡을 수 있었던 허리 중심도 이젠 혼자 힘으로 거뜬하다.
상ㆍ하체 흔들림이 줄어들면서 계단 오르내리기, 한 발로 서기, 제자리에서 뛰기 등을 안정적으로 할 수 있게 됐고, 단추 끼기가 가능할 만큼 양손 협업 능력도 좋아졌다.
무엇보다 민정이가 재활승마를 통해 얻은 가장 큰 수확은 정서적 안정감을 되찾은 것이다. 어두웠던 표정이 사라진 자리에 천진난만한 미소가 돌아왔고, 모르는 사람을 볼 때 나타났던 극도의 경계심은 장난기 섞인 호기심으로 변했다. 또래보다 뒤쳐졌던 표현력도 개선돼 자기 의견을 망설임 없이 표현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말 타러 가기 싫다"며 떼를 쓰던 민정이게에 조랑말을 타러 가는 날(수ㆍ금요일)은 일주일 중 가장 고대하는 날로 바뀌었다. 짜증부터 냈던 병원에서의 물리치료 역시 재활승마 이후 생긴 자신감 때문인지, 어느 순간부터 적극적인 자세로 임하고 있다. '조랑말 타기'라는 든든한 이야기 보따리가 생긴 덕분에 유치원에서도 다른 친구들의 관심과 부러움의 대상이 되고 있다.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항상 소극적으로 살아온 민정이에게 난생 처음 소망하는 일도 생겼다. "엄마, 얼마 전 텔레비전에서 말 타고 달리는 언니들 봤잖아요. 저도 그 언니들처럼 멋진 승마 선수가 될래요." 생글생글 귀여운 미소의 민정이를 바라보는 엄마의 눈에 어느새 그렁그렁 눈물이 맺혔다.
■ 지체부자유 아동 무상 치료, 치료사 등 전문인력 양성도
삼성재활승마
삼성전자 승마단은 2001년 6월 사회공헌사업의 일환으로 재활승마 프로그램인 '삼성재활승마'를 도입했다. 삼성서울병원 재활의학과와 연계해 뇌성마비를 포함한 지체부자유 아동을 중심으로 대상자를 선정, 실내경마장 등 자체 승마 인프라를 활용해 전액 무상으로 재활치료를 실시하고 있다.
승마단 관계자는 "근육운동 여부 등 다양한 사전 검사를 통해 재활승마에 적합한 아동을 선발하고 있다"고 전했다.
특히 효율적인 재활승마 프로그램을 위해 국내에서 유일하게 재활승마 치료사 등의 전문인력을 양성하고 있다. 그 동안 재활승마 프로그램에 참여한 뇌성마비 어린이는 총 300여명에 달하며, 이 가운데 약 78%가 재활승마 치료 후 증세가 호전된 것으로 나타났다.
2001년 세계장애인승마연맹(FRDI)에 가입한 삼성전자 승마단은 해외 전문가들을 초청, 국내 유관기관에 재활승마 프로그램을 알리는 데도 앞장서고 있다. FRDI는 재활승마를 시행 중인 단체나 국가들을 서로 연결시켜 줌으로써 재활승마의 저변 확대에 노력하고 있는 비영리 단체.
선진국의 경우 재활승마는 각종 사고로 신체장애를 겪는 일반 성인들까지 치료 대상에 포함하는 등 널리 행해지고 있다. 재활승마는 의료진과 재활승마 치료사 등의 전문인력 뿐만 아니라 자원봉사자의 도움을 많이 필요로 하는 프로그램이다.
지체장애 어린이 1명에게 재활승마 치료를 시행하려면 최소 4명 이상의 인력이 필요하다. 때문에 지속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는 자원봉사자들의 관심이 절대적으로 요구된다. 지난해의 경우 삼성 임직원과 외부 인사 등 380여명의 자원봉사자가 이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삼성전자 승마단 최경훈 팀장은 "재활승마는 다른 재활 치료에 비해 따뜻한 말의 체온을 느끼면서 함께 할 수 있다는 게 장점"이라며 "이 프로그램 참가자들의 반응이 워낙 좋아서 내년부터는 그 규모를 더 확대하고 재활승마 운영 노하우도 전파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허재경기자 rick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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