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9월 9일 미 의회는 어렵사리 군사작전 하나를 승인했다. 작전명 '크로마이트'(Chromite).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 최대 규모의 상륙작전이었다.
상륙 지점은 한반도의 서쪽 해안인 인천. 6월 25일 북한군의 남침, 사흘 만에 수도 서울 함락에 이어 아군은 낙동강 전선에서 최후의 혈투를 벌이던 상황이었다. '무모하다'는 반발이 적지 않았다. 인천은 조석 간만의 차가 심하고 수로가 협소해 기동 공간 확보가 쉽지 않다는 이유였다. 성공확률이 5,000분의 1이라는 냉소도 흘러나왔다.
하지만 유엔군사령관으로 전쟁을 지휘하던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은 가장 부적합해 보이는 인천에 상륙해야만 성공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9월 15일 새벽, 1단계 상륙 목표인 월미도에서 상륙작전이 감행됐다. 17일 인천 수복. 28일 서울 수복. 전세는 뒤집혔다.
그로부터 58년이 흐른 9일 오전 10시 인천 중구 월미도 남서쪽 1.5㎞ 해상. 건군 60주년을 기념해 이제는 '인천상륙작전'으로 불리는 그 날의 작전을 처음으로 재연하는 행사가 열렸다.
아시아 최대의 대형 수송함인 독도함(1만4,000톤급) 선상에서 이번 작전을 지휘하는 상륙기동부대 사령관 김상돈 해군 대령의 명령이 떨어지자 독도함 및 상륙함(LST)인 향로봉함(4,300톤급)에 탑재돼 있던 한국형 상륙장갑차(KAAV) 26대가 일제히 월미도 해안을 향해 상륙돌격 기동을 시작했다.
코브라(AH-1S) 등 헬기 10대는 공중에서 작전을 개시했다. 앞서 투입된 해병대 수색대원들은 해상 및 공중으로 해안에 침투해 장애물을 무사히 제거했다.
150m 해상까지 접근한 상륙장갑차들이 적의 공격으로부터 피해를 줄이기 위한 연막탄을 터뜨리는 장관을 연출하면서 재연 행사는 막을 내렸다. 해안에 마련된 자리에서 몰라보게 성장한 한국군의 위용을 지켜보던 한 노병(老兵)은 고개를 숙이고 서둘러 손수건을 꺼내 들었다.
이날 행사는 해병대사령부와 인천시가 공동 주최한 인천상륙작전 58주년 기념식의 하나로 마련됐다. 이홍희 해병대 사령관은 "독도함을 비롯해 우리 기술로 개발하고 생산한 최신 장비들을 선보이며 역사의 현장에서 처음으로 인천상륙작전을 재연해 감격스럽다"며 "조국의 운명을 되살리는 전환점이 되었던 인천상륙작전에서 고귀한 영웅들의 희생이 없었다면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민주주의는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 인천상륙작전은
미국 항공모함 '시실리'호를 비롯해 순양함, 구축함 등 연합군 함정 261척, 한미 해병대ㆍ육군 등 8개국의 병력 7만5,000명이 투입된 20세기 마지막 대규모 상륙작전이었다.
9월 15일 오전 6시30분 미 해병대 5연대 3대대가 20척의 상륙주정(LCVP)으로 월미도 해안에 상륙한 것이 1단계 작전이었다. 이어 2단계로 같은 날 오후 5시30분 미 해병대와 한국 해병대가 인천 일대 해안에 상륙, 17일 인천을 완전 수복하기에 이른다.
인천=진성훈 기자
아침 지하철 훈남~알고보니[2585+무선인터넷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