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주
반짝반짝 하늘이 눈을 뜨기 시작하는 초저녁
나는 자식놈을 데불고 고향의 들길을 걷고 있었다.
아빠 아빠 우리는 고추로 쉬하는데 여자들은 엉덩이로 하지?
이제 갓 네 살 먹은 아이가 하는 말을 어이없이 듣고 나서
나는 야릇한 예감이 들어 주위를 한번 쓰윽 훑어보았다. 저만큼 고추밭에서
아낙 셋이 하얗게 엉덩이를 까놓고 천연스럽게 뒤를 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이 들어서 그랬는지
산마루에 걸린 초승달이 입이 귀밑까지 째지도록 웃고 있었다.
달이 고추밭으로 내려왔다.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하얗게 엉덩이를 깐 달이다. 아무리 급해도 그렇지 많고 많은 밭 중에 하필 고추밭을 고를 건 무언가. 그렇지 않아도 붉게 익은 추석 무렵의 고추들이 단단히 약이 올랐겠다. 품속의 씨앗들이 터져라 땡땡 부풀었겠다.
제 딴엔 자못 심각하게 묻는 네 살짜리 사내 아이 앞에서 “입이 귀밑까지 째지도록 웃고 있”는 초승달의 해학이 정겹다. 하회탈을 쓴 듯, 하회탈 중에서도 너무 웃어서(?) 턱이 떨어져나간 이매탈이라도 뒤집어 쓴 듯 천연덕스런 어법에 절로 손바닥 장단이 인다.
저 밭에서 나온 고추에 된장을 찍어 한 그릇 고봉밥처럼 떠오른 보름달을 따그락 따그락 수저 부딪는 소리를 내며 퍼먹고 싶다. 혼자 퍼먹기엔 지나치게 꾹꾹 눌러담았으니 둥그레밥상 주위로 옹기종기 이마라도 맞대고 정담을 나누면서 하는 식사라면 더 좋겠다.
순백의 환한 거름을 뿌린 들판 위로 달이 둥글어간다. 손을 잡고 달 속으로 귀성하는 아이와 아버지의 모습이 아련하다.
손택수ㆍ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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