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시절, 목동에서 바둑 공부할 때다. 하얀 피부, 갈색머리에 안경을 쓰고, 초승달같은 눈웃음을 짓는, 어쩌면 천재 같기도 하고 얼핏 어리버리하게 보이기도 하는 나보다 한 살 어린 남자아이가 바둑교실에 새로 들어왔다. 그 애는 또래 친구들보다 바둑이 무척 강했다. 어린 시절 박영훈에 대한 기억이다.
그후 10여년이 지났고 청년 박영훈은 어느덧 바둑계 정상에 올라섰다. 한데 이 친구가 요즘은 완전 '뺀질이'다. 조금이라도 귀찮은 걸 무척 싫어한다.
어쩌다 연구실에서 청소라도 시키면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인 '살인미소' 한 방 날리고는 금방 또 딴 짓이다. 하지만 내가 누구냐. 영훈이와 10년 넘게 같이 지내면서 그 속을 훤히 들여다 보고 있다. 불쌍한 녀석, 한 마디로 나와는 천적 관계나 다름 없다.
누나로 대접해서 그러는 건지, 아니면 내가 정말 무서워서인지 확실치는 않지만 아무튼 내 말엔 꼼짝 못한다. "너 웃으면서 슬그머니 넘어가려는 거 나한텐 안 통한다는 거 잘 알잖아" 계속 쫓아 다니며 잔소리하면 결국 빗자루를 손에 잡는다. 하지만 요즘은 천적 관계도 많이 약해졌다.
"택시 조금만 타라." "용돈 아껴써라." 이제 이런 잔소리는 한 번 방긋 웃어주는 걸로 땡이다. 전혀 약발이 듣질 않는다. 그러면 나는 금방 삐져서 "넌 고생 좀 해봐야 돼."하고 '악담'을 하지만 진짜 고생은 안했으면 좋겠고. "박뺀질씨, 어서 철 좀 들었으면…." .
내게 바둑으로 많은 도움을 주는 동료 중 하나가 바로 영훈이다. 같이 공부하다 귀찮게 이것저것 물어봐도 전혀 싫은 내색 없이 열심히 가르쳐 주고 복기할 때도 많은 도움을 준다. 그만큼 영훈이는 상대를 편하게 한다.
그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영훈이의 '선한 눈빛'이 아닐까 생각한다. 승부사들은 거의 대부분 눈에 독기가 비친다. 한데 영훈이는 바둑계서 몇 안 되는 '눈빛에 독이 없는 프로기사'다. 난 그 '독없는 눈'을 응원한다. 진짜 강한 사람은 겉으로 부드럽다는 말처럼 언제나 맑은 웃음을 잃지 않는 영훈이의 그 여유로움이 좋다.
영훈이는 기본적으로 '웃는 상'이다. 그래서 순해 보이고 또 실제로도 그렇다. 그렇지만 마냥 순하기만 하다면 어느 분야에서든 정상에 올라서기 힘들다. 당연히 영훈이도 의외로 야무진 구석이 있다.
내가 전에 세계대회에 나갔을 때 시합 당일 오전에 길게 기자회견을 한 적이 있다. 그때 난 속으로 잠깐 "피곤한데 하필이면 왜 꼭 시합 당일에 이런 걸 할까"라고 생각했지만 그리고는 곧 잊어 버렸다.
한데 얼마후 영훈이랑 같이 밥을 먹는데 갑자기 "누나. 시합날 기자회견 해주는 법이 어딨어? 난 저번에 한 번 그렇게 하라 해서 거절했는데." 이러는 거다. "너 진짜 그래서 안 했어?" "당연하지. 누나 진짜 부실해."
특유의 어눌한 말투로 '어리버리한 동생'에게 다그침을 받으니 내가 더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보기보다 의외로 카리스마가 있는 영훈이. 웃으면서 상대가 기분 나쁘지 않게 거절할 줄 아는 당신이 진정한 챔피언입니다.
아침 지하철 훈남~알고보니[2585+무선인터넷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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