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에서도 동유럽 쪽, 흑해와 카스피해 사이 그리고 터키와 이란 위쪽 지역을 일컬어 카프카스 지방이라 부른다.
해발 5000미터를 넘는 여러 산들이 한여름에도 만년설의 자태를 보이는 카프카스 산맥은, 고대로부터 유목과 수렵으로 살았던 많은 민족들의 생존과 전쟁 이야기들로 가득한 곳이기도 하다. 그러한 생존과 전쟁 이야기는 오늘날에도 계속 되는 듯하다.
카프카스의 남쪽에는 그루지야가, 바로 그 위편에 북오세티야 공화국이 인접해 있다. 필자는 러시아 연방 북오세티야 공화국 인권위원회에 속해 있는 인권위원이다. 그곳을 자주 찾아가는 외국인인 필자에게 그들은 그 정도의 명칭을 허락한 셈이다. 지난달에도 그곳을 방문했다.
2004년 9월3일, 북오세티야의 수도인 블라디캅카스에서 북쪽으로 조금 떨어진 베슬란이라는 도시에서 초등학생과 학부모 300여명이 희생된 참혹한 테러사건이 일어났다. 그 사건을 시발점으로, 오세티야 민족은 잔혹한 현대사에 이름을 내밀기 시작했다.
이번 그루지야 전쟁으로 오세티야라는 이름은 공식적으로 두 번째 세계사에 등장한 듯하다. 역시 비극적인 전쟁과 죽음을 통한 것이라는 점에서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
구소련 시절에 오세티야는 남과 북으로 나뉘면서, 북오세티야는 러시아 연방에, 그리고 남오세티야는 그루지야 공화국에 속하게 되었다. 그 때는 그루지야도 소비에트 연방에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큰 문제는 없었다.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그루지야가 러시아에서 독립하면서부터 문제는 심각해진 셈이다. 그루지야가 러시아로부터 독립했다고 해서, 남오세티야 사람들이 조상대대로 살아온 땅을 포기하고 러시아 땅으로 옮겨가지는 않았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러시아와 오세티야라는 분명한 정체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2005년 겨울, 블라디캅카스 교외 어느 곳에서 열렸던 오세티야 민족 대표자 회의에 참석할 귀한 기회가 있었다. 오세티야 민족 대표자들이 한 자리에 모여서, 남오세티야의 미래에 대한 문제를 논의하는 자리였다. 그루지야는 당시 오세티야 민족이 그 땅에서 떠나게 하려고, 남오세티야 지역에 전기와 수도를 끊었다. 그렇지만 그들은 조상대대로 물려온 땅을 떠나지 말고 지켜야 한다고 했다. 장차 언젠가 그루지야와 전쟁을 하게 될 경우 어떤 준비를 해야 할지, 그들은 고대사의 부족 회의와 같은 모임을 열고 있었다.
그 때 그들이 예감하던 전쟁 소식이 3년 뒤인 2008년 한 여름에, 베이징 올림픽 뉴스와 함께 온 세상에 전파됐다. 언론은 러시아와 서방 세계사이 역학 관계 속에서, 국제 유가나 에너지 문제라는 경제적 시각에서 이 전쟁을 바라보는 듯하다.
하지만 오세티야민족 대표자들은 석유나 에너지 같은 문제들에 대해서는 전혀 말하지 않았고 관심도 없었다. 그들은 자기 민족이 당하고 있는 고통과 조상들이 물려준 땅과 관련해서, 그들로서는 당연히 치러야 할 전쟁(just war)에 대해서 의논하고 있었다.
고통과 희생의 조역 내지는 단역으로 세계사에 잠시 등장했다가 물러서는 작은 민족과 나라들에 대하여 이전과는 다른 차원의 관심이 필요하다. '친미냐 친러시아냐'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러시아나 그루지야나 미국이나 서방세계의 입장만이 아닌, 다른 소중한 입장들이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전쟁과 관련해서 많은 나라들이 에너지와 경제 문제에 관심을 집중하는 동안에, 지구상에 100만명이 채 안되는 오세티야 민족은 그 민족의 생존을 위하여 전쟁을 논하고 있었다는 점을 온 세상에 알리고 싶다. 그런 작은 민족들이 다양하고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어야 지구 환경의 미래가 밝은 것이요. 우리 자녀들이 살아갈 글로벌 시대의 미래에 소망이 있는 것이다.
강희창(서초교회 목사ㆍ신학박사ㆍ 북오세티야공화국 인권위원회 인권위원)
<저작권자 ⓒ 인터넷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저작권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