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으로 ‘영화’ 하면 생각나는 곳이 있다. 이탈리아의 로마, 프랑스의 파리, 미국의 LA 할리우드, 인도의 뭄바이. 한국은 서울의 충무로이다. 영화의 거리에선 매해 크고 작은 축제가 벌어진다.
우리 영화의 거리 충무로에서도 작년부터 ‘충무로영화제’라는 축제가 열리기 시작했다. 충무로. 이곳은 실로 우리 영화인들에게는 ‘마음의 고향’ 같은 곳이다. 그냥 그 곳에 가면 보고 싶은 사람이 있을 것 같고, 그곳에 가면 소주 한 잔을 걸치며 영화 이야기를 할 벗이 있을 것 같다.
충무로 한복판에는 ‘스타 다방’이라는 곳이 있었다. 영화를 하기 전이었다. 영화사 직원이 그 곳에서 만나자고 하였다. 다방 이름이 범상치 않았다. 스타들만이 모이는 장소인가 싶어 긴장하였다. 부랴부랴 세탁소에 맡긴 옷을 찾아 입고 달려갔다. 다방 문을 열기 전 옷매무새를 고치고 조심스럽게 들어섰다. 실내는 캄캄했다.
‘스타의 얼굴을 잘 못 보게’ 조명을 낮췄구나 생각했다. 내가 자리를 못 잡고 서성이자 영화사 직원이 나를 불렀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자리에 앉아 두리번거리는 나를 보고 그가 말했다. “여기 처음이군. 스타 없어.” ‘스타 다방’에는 스타가 없었다. ‘스타가 되고 싶어’ 기웃거리는 사람들로 북적이는 곳이었다.
1950년 중반부터 명동 국립극장을 중심으로 모였던 연극배우, 극작가, 스태프들이 진고개를 지나 중부경찰서 주변으로 모여 영화를 만들기 위해 둥지를 튼 곳이 바로 충무로다. 그곳에는 영화의 돈줄인 지방흥행사가 정보를 입수하려고 모여들었고, 감독과 작가들은 퀴퀴한 냄새로 절어 있는 여관방에 쳐 박혀 시나리오를 쓰고 있었다.
제작자는 그 여관방에서 지방흥행사를 모아놓고 시나리오 작가에게 책을 읽게 했다. 시나리오 작가와 감독은 글재주도 좋아야 했지만 변사능력도 뛰어나야 했다. 돈줄이 잘 웃고 많이 울어야 그 자리에서 당장 약속 어음을 끊고, 영화가 만들어 질 수 있는 것이었다.
외국도 마찬가지지만 대다수의 감독과 스태프, 지방흥행사들은 배우가 되겠다는 꿈을 갖고 영화와 연극계에 뛰어든 사람들이었다. 허리우드에 ‘찰리 채플린과 오손 웰스’가 있었다면 충무로에는 ‘나운규와 윤봉춘’이 있었다.
1920년대의 무성영화시대부터 ‘월하의 맹서’의 윤백남, ‘아리랑’의 나운규, ‘임자없는 나룻배’의 이규환, ‘청춘의 십자로’의 안종화를 비롯하여 1950년대 ‘논개’의 윤봉춘, ‘자유부인’의 한영모, ‘잃어버린 청춘’의 유현목, ‘실락원의 별’의 홍성기, ‘시집가는 날’의 이병일, ‘어느 여대생의 고백’의 신상옥, 1960년대의 김수용, 김기덕, 이성구, 김기영 감독 등, 1970년대의 임권택, 하길종, 이장호, 이두용 감독 등, 1980년대의 배창호, 정지영, 박철수 감독 등, 1990년대의 장선우, 이명세, 강제규, 강우석 감독 등, 2000년대에 접어들어 박찬욱, 김기덕, 봉준호 감독 등이, 배우로는 서월영, 이금룡, 문예봉, 황철, 김승호, 황정순, 이민자, 김진규, 이민, 신영균, 신성일, 장동휘, 박노식, 김지미, 엄앵란, 문희, 남정임, 정윤희, 장미희, 안성기, 강수연, 장동건, 송강호, 심은하, 전도연 등등이 충무로를 누볐다.
1909년 한미전기회사가 전차승객을 늘리기 위해 동대문에서 처음으로 미국 영화를 상영하게 된다. 한국영화로는 1919년 신파연극 <의리적 투구> 에 약 10분간 삽입한 김도산 각본 감독의 활동사진이 있었다. 1세기에 걸친 식민생활, 전쟁, 쿠데타, 독재, 경제 환란으로 이어지는 질곡의 세월 동안 우리에게 때로는 웃음보를, 때로는 울음보를 선사한 충무로. 의리적>
새벽 첫 버스가 충무로 역에 도착하면 쏟아지듯 내리는 스태프들. 통금해제 사이렌 소리가 그치기도 전에 왁자지껄 해장국집으로 몰려들던 발길들. 그 모습, 그 소리가 언제부턴가 뚝 끊기고 말았다.
1980년대 후반, 대기업이 충무로에 뛰어들었다. 벤처 붐을 맞아 돈더미가 충무로 하늘 위로 날아다녔다. 충무로의 역군들이 서울에서 가장 비싼 동네, 강남으로 강남으로 넘어갔다. 마침내 전대미문의 영화 중흥기가 1990년대 중반부터 시작되었다. 역대 최고의 흥행기록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갱신되었다. 세계 영화제에서의 낭보도 이어졌다.
그러기 약 10년. 갑자기 비명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이곳저곳에서 무엇인가가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아비규환이 따로 없었다. 2007년 한국영화 수익률은 10% 남짓이었다. 2008년도 그 이상일 리 없다.
지금 충무로 영화축제가 롯데호텔 볼룸에서, 국립극장 해오름 극장에서 일제히 팡파르를 울리며 막을 올렸다. 우스개 소리 하나 하자. 1년 365일 영화제를 하는 나라가 있다. 어디일까? 우리나라이다. 우리나라엔 크고 작은 30여 영화제가 매년 열린다. 영화제 하나에 열흘만 잡아도 300일내내 영화┛?열리고 있다는 계산이 된다.
샴페인을 터뜨려도 너무 심하게 터뜨리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게 되는 대목이다. 어제 폐막한 65회 베니스 영화제에서 우리 영화는 단 한 편도 초청받지 못했다. 이런 걸 수모라고 생각하지 않아도 상관은 없다.
분명한 건 지금 이 순간, 영화사들이 짐을 싸들고 충무로로 하나 둘 돌아오기 시작하고 있다는 점이다. 치열했던 머니 게임을 통해 극도로 황폐해졌던 정신을 추스르며 귀향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의 산업화는 당연하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제도의 변화에 적응할 기간과 훈련이 필요했다. 영화 창작자는 단순하다. 그들은 과학자이고 발명가이다.
그들에겐 그들이 자기 일에 전념할 수 있는 환경이 필요하다. 국가, 권력, 행정, 자본은 영화인에게 창의적 활동을 할 환경만 만들어주면 된다. 나머지는 오로지 그들의 문제이다.
전 세계가 경제 불황이다. 그러나 미국 영화계는 최고의 호황을 누리고 있다. 경제가 불황이면 영화가 흥행한다는 수사(修辭)로 어물쩍 넘어가려 해서는 안 된다. 할리우드의 위기가 회자될 때 그들은 전세계를 무대로 달리고 또 달렸다.
그들의 무한 도전은 말 그대로 위기를 기회로 만들었다. 영화라는 콘텐츠의 특수성을 극대화시켜 새로운 공간,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냈다. 그리고 오늘 날, 우리는 그들이 새로 만들어 내기 시작한 역사 앞에서 경탄을 금치 못하고 있다.
우리 영화의 선구자 춘사 나운규를 기리는 ‘이천 춘사영화제’가 성황리에 끝났다. 우리 영화의 산실인 충무로를 기념하는 ‘충무로 영화제’는 11일까지 열린다.
아무쪼록 이 영화제들을 통해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꿋꿋하게 위대한 영화를 만들어 냈던 선배들의 영화정신을 이어받아 우리 모두가 재도약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길 진심으로 바란다.
아침 지하철 훈남~알고보니[2585+무선인터넷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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