딕 체니 미 부통령이 미네소타주에서 열리고 있는 공화당 전당대회에 끝내 얼굴을 내밀지 않았다. 허리케인 구스타브가 몰아치자 조지 W 부시 대통령과 함께 현장 구호 독려를 이유로 개막 행사 참석 일정을 취소하더니 곧바로 그루지야로 날아갔다.
사실 허리케인이 없었더라도 미국의 정ㆍ부통령 모두 존 매케인 후보 캠프로부터 환영받을 처지는 못됐다. 이라크 전쟁 실패와 경제위기 책임론 등으로 지지도 30%를 밑도는 부시 정부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려는 후보 캠프가 내심 이들의 불참을 원했다는 후문이다. 차리리 허리케인이 부시와 체니의 체면을 살린 쪽에 가깝다.
4년 전에는 달랐다. 대회 3일째인 3일 부통령 지명 수락 연설을 위해 모습을 드러낸 새라 페일린 알래스카 주지사와는 다르게 2004년 뉴욕 공화당 전대 당시 체니 부통령 후보는 4일 내내 전당대회장을 지켰다. 정면 연단의 바로 오른쪽, TV 카메라 앵글에 확실하게 노출되는 자리에 그는 늘 앉아 있었다.
당시 여론은 체니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이라크 정책이 수렁에 빠지면서 전쟁을 강력하게 옹호해온 그를 계속 부통령으로 두는 것은 대통령의 표를 갉아 먹을 것이라는 비판이 따랐다. 건강 이상설을 앞세워 노골적으로 그의 사퇴를 종용하는 움직임도 있었다.
그런데도 그가 전당대회장을 떠나지 않은 이유는 분명했다. 체니 부통령은 공화당의 지지 기반인 보수주의자들의 얼굴이었다."20년 동안 무너지지 않을 보수의 아성을 쌓겠다"고 선언한 골수 공화당원들은 부시 대통령의 어수룩한 모습 뒤로 보이는 체니의 묵직한 인상에서 흔들리지 않는 신념을 보았다.
이는 선거의 귀재로 통하는 칼 로브의 치밀한 연출이기도 했다. 어차피 민주당 표를 끌어오기는 어렵고 부동표는 갈리는 이상 골수 지지층의 충성심을 자극해 투표장으로 끌어내는 게 승리의 지름길이라고 그는 판단했다. 그 판단은 적중했다. 기독교 복음주의자, 중남부의 보수적 백인들은 민주당 성향 지역에서 투표율이 올라가자 마감을 코 앞에 두고 투표장으로 향했다.
스스로 '공화당의 이단아'로 자처해온 매케인 후보의 고민은 정확히 이 지점에 머문다. 부시, 체니와 완전히 등지자니 정통적인 보수 텃밭이 어른거리고, 인기 없는 그들을 앞세우자니 낙태 동성애 이민정책에서 공화당 주류와 거리를 두면서 쌓아온 자신의 정체성을 살릴 수가 없다.
무명이나 다름없는 페일린 주지사를 러닝메이트로 낙점한 데에도 이런 고민이 녹아 있다. 태아가 다운증후군에 걸린 사실을 알고도 출산한 페일린은 낙태 등 전통적 가치에서 매케인을 믿지 못하는 보수주의자들을 달래는 카드로 선택됐다. 하지만 그녀가 체니 부통령과 같은 무게로 보수주의자들의 마음을 붙잡기에는 힘이 부쳐 보인다. 오히려 고교생 딸의 임신 사실이 알려지면서 공화당 지도부를 당혹스럽게 하고 있다.
4년 전 미국은 둘로 갈라져 있었다. 보수와 진보, 레드(공화당)와 블루(민주당)스테이트로 갈라서 50대 50의 정국 구도를 형성하고 있었다. 부시 정부 집권 2기가 끝나 가는 시점에서 치러지는 11월 대선도 이 구도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다. 지지 정당의 이념에 충성하는 유권자들의 발걸음이 여전히 선거를 움직이는 최대의 변수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매케인이 보수주의자들의 끊임없는 의심을 씻으면서 그들을 투표장으로 끌고 갈 수 있을까. 전대 이후 미국 대선을 바라보는 흥미로운 포인트가 될 듯 싶다.
김승일 국제부장 ksi8101@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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