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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문학의 뜨락] ② 소설가 김주영 문경새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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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문학의 뜨락] ② 소설가 김주영 문경새재

입력
2008.09.03 0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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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여 년 전 신문사와 장편소설을 연재하기로 합의한 이후 나는 무척 초조해졌다. 제목을 <객주> 로 하겠다는 결정까지 이르렀으나, 정작 고민하고 있었던 것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걱정거리란 바로 소설의 출발점을 어느 곳으로 잡아야할 것인지 그때까지 결정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조선시대 때는 한강의 물길을 따라 번성하였던 장시가 여럿이었고, 내륙에서 열렸던 장시들도 있었다. 아니면 바닷가에서 열린 파시들도 여럿이었다. 일정이 코앞으로 다가오고 있음에도 나는 배낭을 메고 길을 떠났다.

기차와 버스를 여러 번 갈아타면서 이곳저곳을 무작정 헤집고 다녔다. 그 시절 나는 헤적헤적 걸어다녀야만 머릿속에 무언가를 떠올릴 수 있었다. 물론 그 이전까지 전국의 장터풍경을 섭렵한 터이지만, 다시 장터를 찾아 나선 것이었다.

한 달 정도를 정처 없이 그렇게 헤매 다니던 끝에 한가지 상념이 떠올랐다. 소설의 주제가 되는 보부상들의 기구한 생애는 태어나서 이승을 하직할 때까지 모두가 길 위에서 떠날 수 없는 운명들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때 나는 문경 새재 옛길을 걸어서 넘고 있었다. 제1관문인 주흘관과 제2관문인 조곡관을 지나 제3관문인 조령관까지 얼추 7㎞에 가까운 길을 이틀에 걸쳐 문경 땅과 괴산 땅을 번갈아 넘어갔다 넘어오는 것을 숙맥처럼 반복하였다.

비로소 조선시대 한양과 동래를 가장 짧은 거리로 이어주는 영남대로 중에서 가장 험준한 고갯길을 발견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강과 낙동강을 가장 빨리 이어주는 축의 역할을 해온 문경 새재 길은 그래서 험준할 수밖에 없었다.

흔히들 이 새재 길을 두고 과거 길에 오른 영남의 선비들과 목민관들의 행차가 많았던 곳으로 회자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이 길의 의미와 역할을 축소 해석한 것이다.

선비들이나 목민관들뿐만 아니라, 조선시대 남쪽과 북쪽의 모든 물산과 인물들이 이 새재길에서 서로 교차하고 혹은 부딪치며 소통했다는 증거들이 너무나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새재 옛길에 있는 해국사는 한때 이곳에 창궐하였던 도둑 떼들에게 점령당했던 적도 있었을 만큼 험준한 산새를 갖고 있다. 그래서 새재라 부른다. 새들만 넘을 수 있는 고개란 뜻도 있지만, 새들도 넘기가 어렵다는 뜻도 함께 있다.

해국사 주변에 출몰했었던 도둑떼들은 길을 지나는 행인들의 발길을 공공연하게 가로막고 초장료(통행료)를 요구했었다. 노자가 넉넉하지 못한 행인이 그 요구에 만족한 해답을 주지 못하면 가차없는 만행을 저지르곤 하였다.

그래서 고갯길 아래에는 필경 숫막(주막)이 들어앉아 장사를 벌였다. 숫막에 먼저 당도한 행인은 같은 길을 뒤따라올 또 다른 행인을 기다린다.

어떤 때는 상당한 기간 동안 숫막에서 체류하게 되지만, 조선시대 숫막에서는 음식값만 받았을 뿐, 숙박료는 받지 않았다. 그래서 모여든 행인 20여명이 되어야 비로소 고갯길을 넘기 시작했다. 도둑 떼들의 피해를 막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토록 험한 길이 지금은 맨발로 제2관문까지 걷기 대회를 개최할 만큼 걷기 좋은 길로 다듬어 놓았다. 개발이 최고의 선이었던 지난 시절에도 이 문경 새재 만큼은 포장하지 않았던 것은 문경이 거둔 크나큰 소득 중에 하나일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험준하다는 고갯길을 빗자루와 손으로 흩어진 돌을 줍고 쓰레기를 치워 전국에서 손꼽히는 관광자원으로 부상시킨 문경사람들의 상상력과 감성에 감탄한다. 앞으로 이곳에 고려시대 때의 건축 양식을 되살린 고려촌이 들어설 예정이라 한다.

지난 달, 문경새재 걷기 대회가 열리기 하루 전날, 나는 또 이 길을 혼자서 걷고 있었다. 그리고 그 길 위에서 내 얼굴을 알아보는 가정주부들과 마주쳤다. 사진을 찍자고 내 팔을 스스럼없이 끌어당기는 그들 부부들의 웃음 띤 얼굴에서 너무나 건강하고 밝은 우리네 삶의 미래를 예견하게 된다.

산길에서 서로 마주친 사람들끼리 길섶으로 비켜 앉아 싸온 김밥을 나누어 먹으면서 찌든 우리네의 삶도 분수를 지키고, 생각을 고쳐 가진다면 얼마든지 밝은 내일을 기약할 수 있다는 생각에 이른다.

걸으면 걸을수록 관절은 아파 오고 발바닥에 물집이 잡히고 신발의 무게가 느껴지게 되지만, 그것은 반드시 극복할 수 있다는 희망을 문경 새재 고갯길의 풍광은 가르쳐 준다. 고갯길 하나가 무엇이 그토록 대단한 것을 깨닫게 해주겠는가 싶겠지만, 그건 새재 길을 걸어 보면 필경 깨닫게 될 것이다.

인물 심리 변화·사건 이끌어가는 주체작가 상상력으로 역사적 특수성 재발견

대하소설서 공간배경은

대하소설에서 공간 배경은 단순히 실제 공간의 형상을 묘사한 수준에 머물지 않는다. 공간은 작중인물, 시간과 상호작용하면서 이야기를 끌어가는 주체다.

문학평론가 장일구씨는 "소설 속 공간은 서술자의 지각과 정서에 따라 부단히 재구성되면서 시간 흐름의 일방향으로 전개되는 서사를 풍성하게 만든다"고 말했다.

일테면 작가는 공간 묘사를 통해 인물 심리 변화, 사건 전개 방향 등을 세련되게 보여줄 수 있다는 것. 그런 만큼 수다한 인물과 사건이 교차하는 대하소설에 도전하는 작가에겐 자신의 문학적 상상력에 조응할 공간 모델을 찾는 것이 급선무다.

1960년대 말 <토지> 를 구상하던 고(故) 박경리씨는 당시 대학원생이던 딸 김영주 토지문화관장의 탱화 자료 수집 여행에 동행했다가 섬진강 하류가 펼쳐놓은 너른 들판, 경남 하동군 평사리를 보고 무릎을 쳤다.

"통영에서 태어나 진주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나는 경상도 아닌 다른 지역 토속어를 구사할 수 없었고, 그래서 작품 무대를 경상도에서 찾으려 했다. 하지만 만석꾼의 토지는 전라도 땅에나 있었고, 경상도 안에는 그만큼 광활한 토지를 찾기 힘들었다. 그런 와중에 평사리를 발견했다.

그곳의 넓은 들, 그리고 섬진강의 이미지와 지리산의 역사적 무게는 <토지> 의 든든한 배경이 돼줄 수 있는 것이었다." 평사리를 먼발치에서 봤을 뿐 들어와 본 적이 없었던 박씨가 묘사한 최 참판댁이 마을 고가(古家)의 실제 모습과 너무 흡사했다는 일화는 잘 알려져 있다.

여순반란사건에서 휴전협정에 이르는 5년을 다룬 조정래씨의 <태백산맥> 은 전남 보성군 벌교 일대를 주 무대로 삼는다. 비옥한 농경 지대인 벌교는 토지 및 소작료 문제를 둘러싼 지주와 소작인의 계급적 갈등이 심해 해방 직후 '무상몰수 무상분배'를 내세운 남로당의 토지정책에 대한 지지가 높은 곳이었다.

1948년 벌교는 여수 14연대 반란군에게 장악됐다가 진압군에게 탈환됐고 이 과정에서 많은 이들이 '반동'이나 '빨갱이'로 몰려 학살됐다. 조씨는 소작쟁의가 여순반란사건의 본질이라는 참신한 해석을 내놓으며 이후 격변의 한국 현대사를 벌교라는 한정된 공간에 집중시켜 다룬다.

평론가 김윤식씨는 "벌교의 경제사회적 특수성이 작가의 기억 속에 철저히 용해돼 있다는 점에서 <태백산맥> 의 참주제이자 참주인공은 벌교"라고 말했다.

황석영씨가 장장 10년(1975~84)에 걸쳐 한국일보에 연재한 <장길산> 은 미륵 신앙을 바탕으로 한다. 소설은 전남 화순 운주사를 무대 삼아 그곳에 얽힌 미륵 신앙 관련 전설과 민담을 이야기 속에 한껏 취한다.

경내 도처엔 미륵 불상 70기가 흩어져 있는데 황씨는 그 바위 부처들에서 "살아서 만나지 못하는 가족들이 죽어 부처가 되어 함께 살아가는 모습"을 연상했다.

그중 야산 꼭대기에 누워 있는 부부 미륵에 관한 전설이 유명하다. 세상이 바르지 못해 거꾸로 처박혀 있는 두 와불이 바로 일어설 때 1,000년 동안 용화세계가 이뤄진다고 한다.

이훈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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