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대통령은 건설회사 최고경영자(CEO) 출신이다. 조석래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이 사돈(셋째 사위의 큰아버지)이고, 맏사위는 재벌 기업 임원이다. 둘째 형인 이상득 한나라당 의원도 LG가(家)와 인연을 맺고 있다. 대통령 당선 후 첫 방문지가 전경련이었고, 대통령직 인수위 시절부터 친기업 정책을 쏟아낸 게 어쩌면 당연해 보인다. 취임 이후 줄곧 '비즈니스 프렌들리'를 외쳤음은 물론이다.
그리고 8ㆍ15특사를 통해 경제인들을 대거 사면ㆍ복권시켰다. '경제 살리기'에 동참시키겠다는 명분 하에 형이 확정된 지 수개월밖에 되지 않은 재벌 총수들까지 포함하는 무리수를 뒀다. 이어 출자총액제한제 폐지, 지주회사 규제 완화 등의 법안 추진도 공식화했다. 1일에는 재계가 줄기차게 요구해온 법인세율 인하, 상속ㆍ증여세 및 종합부동산세 경감 등을 내용으로 하는 21조원 규모의 감세안을 내놓았다.
그런데 기업하기 좋은 환경 조성에 각별히 노력해왔다고 자부하는 친기업 정부가 요즘 재계에 눈총을 주고 있다. "경제 살리기라는 이유로 욕 들어가면서 특별사면도 해 줬는데, 투자는 뒷전이고 다른 기업 먹기나 자식들 물려주기에 급급한 기업들이 꽤 있다."(여당 대변인) 박희태 한나라당 대표는 "특사 혜택을 받은 경제인들은 말로만 고맙다고 하지 말고 행동을 보여야 한다"고 노골적으로 압박했다.
그러자 김승연 한화 회장, 최태원 SK 회장 등 사면 혜택을 받은 기업인들이 사상 최대 규모의 고용 창출과 투자를 약속하고 나섰다. 이전 정부는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갔다"고 고백했는데, 마치 군사정권 시절 권력으로 기업을 좌지우지하던 관치경제 시대로 되돌아간 느낌이다.
이제 대기업들이 투자를 약속했으니, 고용이 늘어나고 내수도 살아나는 것일까. 증권선물거래소 자료를 보면 546개 상장기업이 내부에 쌓아둔 현금성 자산은 2007년 말 현재 약 63조원으로 1년 전보다 20%나 늘어났다. 이 중 10대 그룹이 쌓아둔 돈이 33조5,000억원으로 절반을 넘는다. 최소한 투자 부진의 원인이 돈이 없어서는 아닌 셈이다. 때문에 세금 깎아주고 규제 풀어준다고 기업들이 투자를 늘릴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전문가들은 외환위기 이후 신자유주의 물결 속에 주주자본주의가 확산되면서 경영 패러다임이 성장에서 안정 위주로 바뀐 게 투자 부진의 근본 원인이라고 지적한다. 외환위기 당시 '대마불사' 신화가 무너져 내리는 것을 목도한 대기업들이 '묻지마 투자' 방식에서 벗어나 수익성을 가장 중시하는, 어찌 보면 '합리적인' 투자행태를 보이고 있다는 말이다.
대기업의 투자가 고용 창출로 연결되는 시대도 끝났다. 대기업(500인 이상 기준) 소속 근로자 수는 1993년 210만명에서 2005년 131만명으로 대폭 줄어든 반면, 정규직 임금의 절반 정도를 받는 비정규직은 전체 임금근로자의 56% 규모로 커졌다. 대기업 중심의 경제성장 전략이 양질의 일자리 창출에도 기여하지 못한 셈이다.
그렇다면 친기업 정책의 핵심인 감세와 규제완화가 투자와 고용을 늘릴 것이라는 논리구조는 재검토되는 게 당연하다. 재계도 새 정부가 친기업 정책을 유난히 강조하는 데 대해 부담을 느끼는 모습이다. 한 재계 인사는 "비즈니스 프렌들리 탓에 기업들만 욕을 먹고 있다"고 불평했다.
재벌에 대한 국민들의 인식이 여전히 좋지 않은데, 괜히 대기업에 특혜를 준다는 오해만 산다는 것이다. 태생이 친기업적인 정권에 친기업 정책의 포기를 강요할 수는 없지만, 실효성도 의문시되고 재계도 좋아하지 않는다면, 굳이 '비즈니스 프렌들리'라는 용어를 고집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고재학 경제부 차장 goindol@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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