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암 말기 진단을 받고 투병하던 그는 산소통을 메고 청와대를 찾았다. 김영삼 대통령과 독대해 경상적자 누적과 고금리ㆍ고임금 행진으로 비상벨이 울리고 있던 한국경제에 대해 직언하며 "비상조치를 늦추면 큰일난다"고 호소했다. 국가부도가 초읽기에 들어가자 아픈 몸을 이끌고 다시 한 번 김 대통령을 만나 긴급명령 발동을 통해 금리 인하와 임금 동결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그러나 한 달 후 임창열 경제부총리와 미셸 캉드쉬 국제통화기금(IMF) 총재가 IMF의 구제금융 지원을 위한 양해각서를 체결하는 보도를 접하며 눈물을 삼켜야 했다.
▦ 최종현 전 전국경제인연합회장은 우리나라가 IMF의 긴급 자금지원을 받기 전인 1997년 10월, 11월 두 차례 김 전 대통령과 만났다. 병마와 싸우던 그가 특단의 대책을 건의한 것에 대해 김 전 대통령은 "알아보겠다"고만 했을 뿐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고 하지만, 김 전 대통령이 그의 고언(苦言)을 경청했더라면 '경제 국치'를 피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SK가 최근 그의 10주기를 맞아 펴낸 책 <최종현, 그가 있어 행복했다> 에서 그를 추모하는 글을 쓴 정ㆍ관ㆍ학계 인사들이 이 같은 아쉬움을 많이 토로했다. 최종현,>
▦ 그는 우리 경제의 10년, 20년을 내다보고 어젠다를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93년 전경련 회장에 취임한 후 98년 8월 타계할 때까지 연임하면서 국가경쟁력강화위원회 발족을 주도하고, 국경없는 무역전쟁 시대를 맞아 세계가 하나의 시장이 되는 글로벌라이제이션(Globalization)의 중요성을 일찌감치 강조했다.
10년의 세월이 흘러 이명박 대통령이 청와대에 국가경쟁력강화위원회를 설립한 것을 보면 시대를 앞서가는 통찰력이 돋보인다. 그가 자주 입에 담았던 글로벌라이제이션도 지금은 흔히 쓰는 말이지만, 90년대 초반만 해도 생소한 개념이었다.
▦그는 소신 발언으로 설화 사건을 자주 겪었다. 문민정부가 업종 전문화와 소유 분산을 추진한 것에 대해 "에디슨이 전구 만들 때나 하는 이야기"라며 비판했다가 정부에 사과해야 했다. SK그룹도 세무조사를 받았다. 그래도 "재계를 위해서라면 내 사업이 타격을 입더라도 대통령에게도 맞서야 한다"는 소신을 고수했다. 환란 후 최악의 위기를 맞아 재계 리더의 역할이 중요해지고 있지만 최 전 회장처럼 나라경제를 위한 큰 그림을 제시하고, 쓴소리도 마다하지 않는 총수가 드물다는 점에서 새삼 그의 빈 자리가 커 보인다.
이의춘 논설위원 eclee@hk.co.kr
아침 지하철 훈남~알고보니[2585+무선인터넷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