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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감독 하명중의 나는 지금도 꿈을 꾼다] <35> '별들의 고향' 주연 정윤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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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감독 하명중의 나는 지금도 꿈을 꾼다] <35> '별들의 고향' 주연 정윤희

입력
2008.09.01 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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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영화계를 노크한 것은 1974년, <별들의 고향> 의 주인공 ‘경아’ 신인공모 때였다. 3차에 걸친 심사에 그녀는 서울이 멀다 하지 않고 새벽같이 고속버스에 몸을 싣고 부산에서 달려왔다. 작은 키에 잠을 설친 탓인지 얼굴은 약간 부어있었다.

그러나 다른 응시자와 달리, 화장을 하지 않은 맑은 얼굴과 초롱초롱한 눈망울은 심사위원들의 시선을 한 눈에 사로잡았다. 그녀는 최종 후보 2인중 한 명이 되었다. 문제는 연기력이었다. 갖은 세파를 겪어야 할 ‘경아’ 역을 신인에게 맡기기엔 부담이 컸던 것이다. 심사결과가 <선발자 없음> 이 되자, 최종 후보였던 두 사람에게 충무로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문희, 남정임, 윤정희, 트로이카가 떠난 영화계는 그야말로 여배우 기근 현상에 허덕이고 있었다. 젊은 감독들은 당시 청년 영화 운동의 발판이었던 <영상시대> 를 통해, 영화진흥공사와 제작사들은 거액의 출연료를 걸고 신인공모전으로 ‘여배우 찾기’에 전력을 다 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무주공산 시절’ 그녀는 충무로 입성에 성공한다.

그러나 처음 출연한 두 편의 영화가 성공적이지 못했다. 내가 그녀를 다시 만난 것은 1976년, <목마와 숙녀> 촬영현장 동대문야구장에서다. 그녀는 2년 전 신인공모 때의 모습과 전혀 변함이 없었다. 다만 조금 지친 듯 해 보였다. 여느 여배우처럼 매니저나 가족의 도움을 받지 않고 있었다.

영화 속에서 나는 슬럼프에 빠진 대학야구선수였고 그녀는 뇌종양에 걸려있는 여자 친구였다. 그녀의 성품은 매우 온화하였다. 감독과 나의 연기지도에 열심히 따라주었다. 또한 스태프들에게도 예절을 바르게 하여 사랑을 받았다. 영화가 완성이 되었다. 기자 및 평론가 시사 반응이 매우 좋았다. <정윤희의 연기 가능성> 이 특히 평가되었다.

점차 ‘신 트로이카’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연방영화사의 <그대의 찬 손> 에서 뽑힌 ‘유지인’, 우성영화사의 <성춘향전> 에서 뽑힌 ‘장미희’, 그리고 <목마와 숙녀> 의 ‘정윤희’. 세 여배우의 각축은 치열했다. 유지인은 부유한 가정과 전속영화사의 막강한 지원을 받고 있었고, 장미희는 매니저와 ‘특수한 엄마’의 동행으로 ‘로비력’에서 단연 앞서고 있었다.

막차에 겨우 올라탄 그녀로선 벅찬 게임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녀에게 확신이 갔다. 해볼 만한 게임이었다. ‘그녀의 순수(純粹)와 미(美)’가 나를 끌었던 것이다.

나에게 출연 제안하는 감독과 제작자에게 서슴없이 그녀를 추천하였다. 매니저가 없는 그녀는 나에게 출연 여부를 물었다. 순식간에 내가 정윤희의 매니저라는 소문이 퍼졌다. 그녀에게 일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나는 그녀에게 매니저가 필요하다고 하였다. 양순한 B씨를 매니저로 정했다. <고교 얄개> 에 함께 출연하였다. 대박을 터트렸다. 2탄, 3탄이 이어졌다.

정윤희는 당당하게 ‘신트로이카’에 올라타 앞서 달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인기가 최고로 치솟아도 태도의 변화가 전혀 없었다. 촬영약속 시간을 철저히 지켰고 선후배 연기자들에게 대하는 예절도 만점이었다. 힘든 일을 하는 조명, 소품, 연출부원에게도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런데 도가 약간 지나쳐 제작부에서 출연료를 주지 않아도 말을 제대로 하지 못 하였다.

그녀의 매니저 ‘양순한 B씨’도 그러했다. 이럴 땐 별 수 없었다. 내가 해결을 했다. 겹치기 출연이 잦아지자 현장에서 스태프들과 충돌이 일어났다. 며칠씩 집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차안에서 새우잠을 자며 촬영장을 이동하면 지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느 날, 촬영 현장에서 문제가 생겼다.

그녀는 조명부가 그녀 얼굴에 라이트를 조정하느라 NG를 계속 내자 참지 못하고 소리를 치며 카메라 앞을 떠난 것이었다. “대강해요.” 힘든 것은 스태프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바쁜 스케줄에 맞추기 위해 하루 종일 기다리던 그들이었다. 그들도 폭발했다. “그래. 대강 가자. 썅.”

다행히 큰 사고는 나지 않았다. 장소를 이동하며 그녀가 내게 물었다. 왜 화가 나도 스태프들에게 짜증을 내지 않느냐고.

“저 사람들이 우리를 위해서 애 쓰는데, 고맙잖아…”

그녀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것이 그들의 직업이 아니냐는 표정이었다. 나는 얼마 전 교통 신호를 위반했던 경험을 들려주었다. 교통순경은 딱지를 떼려다 면허증을 보고는 활짝 웃으며 조심해 가라고 경례까지 붙여주었다. 그 순간, 우리는 사회에 준 것도 없는데 일방적으로 사랑만 받는 것이 너무 부끄럽고 감사하다는 것을 느꼈다고 얘기해 주었다.

그녀는 금세 알아들었다. 바로 스태프들에게 달려가 “죄송했어요. 나 예쁘게 찍어줄려고 하신 것도 모르고” 라고 사과를 하였다. 스태프들도 밝게 웃었다. “아니에요. 죄송해요. 빨리빨리 할게요.”

나의 영화배우생활 15년 중 그녀와 함께 한 5년간이 나의 하이라이트 기간이었고, 그녀와 함께 한 영화 9편은 흥행에서 다 홈런이었다. 경쟁 여배우들은 나를 ‘윤희 오라버니’라고 불렀다고 한다. 나는 감독 전향에 앞서 1980년, 그녀와 <최후의 증인> 을 마지막으로 연기하였다.

그녀는 1980, 1981년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 ,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 로 대종상 여우주연상 연속 수상, 한국일보 연기대상, KBSTV 연기대상 등을 휩쓸며 한국 최고배우로서의 입지를 확고히 했다.

나는 1983년 감독으로 데뷔하였고, 그녀는 그 다음해 결혼을 위하여 스타 좌(座)를 내놓고 훌훌 은막을 떠났다. 1985년, 나의 두 번째 감독작품 <태> 의 출연 제의를 위해 그녀를 만났다. 그녀는 옛 모습 그대로였다.

그러나 마음은 영화에 있지 않았다. 그녀는 결혼하며 남편과 약속한 것을 말하였다. 남편은 그녀에게 “남편과 가정만을 사랑해 달라고” 부탁했다고 했다. 그녀는 그토록 사랑한 영화를 잊어야 했다. <하나의 사랑 - 남편을 위하여> . “오빠, 정말 미안해요.”

나는 결코 섭섭하지 않았다. 그녀의 행복한 모습이 너무 기뻤다. 그녀를 꼭 껴안아 주었다. 돌아가는 그녀의 모습은 위대한 승리자였다. 그녀가 돌아보며 나에게 손을 크게 흔들어보였다. 그녀의 남편 사업이 어렵게 되었다는 소문이 났다. 이어 그녀가 남편 사업을 일으키기 위해 불철주야 뛰고 있다는 소식도 들렸다.

너무나도 훌륭한 부인이 아니냐는 찬사도 꼬리처럼 붙어다녔다. 그리고 마침내 어려움에서 벗어나 다시 일어났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녀는 해냈다. 물론 나는 그녀가 이겨낼 것을 알고 있었다. ‘정윤희’, 우리는 그녀를 볼 수가 없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삶을 일궈가며 행복하고, 우리는 ‘아름다운 여배우 정윤희’를 떠올리며 행복해 한다. 행복은 미소를 만들어 주고, 그래서 나는 오늘도 혼자 빙그레 미소지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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