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그룹(옛 선경그룹)의 역사는 '수펙스(SUPEX.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 수준 추구) 정신'으로 집약된다. SK를 일군 고(故) 최종건.종현 형제는 숱한 난관을 패기와 지성으로 극복해 냈고, 이 정신을 이어받은 최태원 회장은 남다른 열정으로 SK의 성장을 구현하고 있다."<권오용 sk그룹 브랜드관리실장>권오용>
SK의 55년 역사는 한 편의 기업 인수ㆍ합병(M&A) 드라마이기도 하다. SK는 민영화 대상이던 대한석유공사(유공)와 한국이동통신(SK텔레콤)을 잇따라 인수하며 단숨에 '석유'와 '통신'이라는 양대 성장 축을 마련했다.
이 때문에 SK가 너무 손쉽게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한 게 아니냐고 폄하하는 시각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SK의 성장사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섬유와 석유, 통신에 이르기까지 '맨손과 열정'으로 일궈낸 무수한 원천기술 개발의 성공신화가 자리잡고 있다.
SK가 만일 기업 M&A에 안주했다면 오늘날의 SK는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창업 형제의 열정과 패기를 발판으로 인수 기업을 더 크고 공고하게 성장시키려는 노력이 있었기에 지금의 SK가 가능했다는 말이다.
SK는 최종건 회장이 1953년 4월 8일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된 경기 수원시 권선구 평동에 선경직물을 세우면서 시작됐다. 최종현 회장이 62년 선경직물 부사장으로 취임하면서 패기(최종건)와 지성(최종현)의 쌍두마차 체제로 성장했다.
1980~90년대 석유와 이동통신 사업에 잇따라 진출하며 '석유에서 섬유'에 이르는 수직계열화를 이뤘고, '단군 이래 가장 큰 소리칠만한 기술'인 CDMA 신화를 창조했다. 이는 통합과 변화를 내다보는 오너의 '열정과 패기'가 뒷받침됐기 때문이라는 게 일반적인 평가다.
■ SK 성장의 원동력은 '원천기술 개발'
"원사공장 지으면 좋다는 걸 누가 모릅니까?" 1966년 1월30일, 창업주 최종건 회장의 마흔 번째 생일날. 선경직물 전체 임원회의에서 최 회장이 목소리를 높였다. 동생인 최종현 회장이 원사공장 건립 계획을 발표한 직후였다. 당시 직물공장은 원재료인 원사를 수입에 의존했는데, 공급이 상당히 불안정했다.
때문에 30억원이 소요되는 원사공장 건립은 선경직물의 숙원사업이기도 했다. 하지만 임원들은 당장 원사공장을 짓는 것은 불가능하다며 고개를 저었다. 이날 회의에는 선경그룹의 첫 대졸 신입사원 손길승 전 회장도 참석했다.
그런데 최종현 회장이 뜻을 굽히지 않았다. "돈은 현물차관 방식으로 진행하면 된다. 일본에 외상으로 원사 300만달러 어치 공급을 요청하고, 이 원사로 상품을 만들어 3년 내 갚는 계약을 하자." 현물차관은 당시로선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획기적인 외자유치 방안이었다.
최종현 회장은 결국 형을 설득하는데 성공했고, 이후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됐다. 68년 12월 아세테이트 원사공장이, 이듬해 2월엔 폴리에스테르 원사공장도 완공됐다.
우리나라의 원사 생산력은 하루 35.5톤에서 48톤으로 늘었고, 선경은 이 중 26%를 생산하는 국내 1위 원사메이커로 성장했다. 선경그룹 최초의 도약이었다. 불가능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노력하는 '수펙스' 정신도 이때 태동했다.
최종현 회장은 선경이 원사공장 건설로 승승장구 했지만, 더 큰 성장에는 한계를 느꼈다. 돌파구가 필요했다. 최 회장은 오디오의 자기테이프에 사용되는 폴리에스테르 필름을 주목했다. 그러나 미국의 듀폰사 등은 기술 이전을 거부했다. 최 회장의 패기와 열정은 난관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최 회장은 74년 여름 수원공장 사무실에서 임원들에게 "우리 힘으로 폴리에스테르 필름을 개발해보자. 한국인의 가능성과 선경의 저력을 믿는다"고 독려했다.
선경은 필름 생산시설에 400억원을 투자했고, 월 4% 고리의 사채까지 동원했다. 하지만 필름 개발은 쉽지 않았다. 개발 착수 1년이 넘도록 난항을 거듭했다. 77년 9월 공장장이 최종현 회장을 다급히 찾았다.
드디어 완제품 시험에 성공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에 또 하나의 암초를 만났다. 선경이 필름 완제품 개발에 성공했다는 정보를 입수한 일본업체가 국내 다른 업체에 필름 기술을 제공키로 한 것이다.
최 회장은 여기서 주저앉을 수 없었다. 비밀리에 필름을 개발해온 최 회장은 완제품 시험에 성공했음을 공표한 뒤 정부에 기술보호를 전격 요청했다. 정부는 선경의 독자기술을 인정, 일본업체의 국내 기술 이전을 불허했다. 이처럼 원천기술 개발에 대한 열정과 패기가 있었기에 한국이동통신 인수 후 세계 최초로 CDMA 상용화라는 쾌거를 이뤄냈다.
■ 열정을 통해 변화해야 한다
SK의 지성과 패기의 역사는 열정으로 녹아 든다. 최태원 회장은 지난해 7월 SK그룹을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했다. 최종건 회장이 1953년 직기(織機) 15대로 선경직물을 세운 것이 '제1의 창업'이고, 최종현 회장의 1975년 수직계열화 선언이 '제2의 창업'이라면, 최태원 회장의 지주회사 전환은 '제3의 창업'에 해당된다.
최 회장은 전 계열사 흑자 전환을 통해 재무구조를 개선했고, 내수 위주의 사업구조를 수출 주도형 사업구조로 바꿨으며, 지주회사 전환을 통해 지배구조도 업그레이드했다.
최 회장은 "'열정을 통한 변화'는 선택이 아닌 생존과 성장 조건이며, 특히 속도 있는 변화가 중요하다"면서 "기업 경영에 있어 변화는 선택이 아니며, 나아가 세상의 변화 속도보다 우리의 변화 속도가 떨어진다면 낙오자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SK는 최종현 회장에게서 이어받은 열정과 패기를 기반으로 글로벌 경영이라는 새로운 도전을 전개하고 있다.
●권오용 브랜드관리실장이 말하는 SK "사람이 곧 회사" 철학이 성공 일궈
"열정과 패기는 바로 사람에서 나온다. SK의 저력은 사람을 믿고 중시하는데 있다. 수원의 자그마한 직물공장으로 출발한 SK가 글로벌 100대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비결은 한 순간도 사람의 중요성을 잊지 않았기 때문이다."
권오용 SK그룹 브랜드관리실장은 SK의 성공비결을 한마디로 '열정과 패기를 가진 사람을 향한 정신'이라고 요약했다.
그는 "1953년 SK그룹 태동 당시부터 전통으로 내려온 '인내사(人乃社)', 즉 '사람이 회사'라는 철학이 오늘의 SK를 있게 한 힘의 원천"이라며 "회장이 매년 '신입사원과의 대화'에 참석, 격의 없이 토론을 하는 전통도 SK그룹의 인재중시 관행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고 설명했다.
"SK는 신입사원을 초급경영자로 대우한다. 경영자인 만큼 회장과 눈높이가 같아야 한다. 회장과 신입사원이 격의 없이 대화를 나누는 것은 신입사원을 사회 초년병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동업자로 인정하고 경영자의 정신을 심어줘야 한다는 뜻이 담긴 것이다."
권 실장은 SK의 인재중시 전통은 26일 10주기를 맞은 고(故) 최종현 회장에게서 비롯됐다고 강조한다. "최 회장은 인재 양성 여부에 따라 회사의 흥망이 갈린다고 봤다.
따라서 사람을 잘 키우기 위해 체계적인 교육프로그램의 중요성을 늘 강조했고, 그 속에 열정과 패기를 담으려고 노력했다." 최태원 회장도 지난해 제주에서 열린 최고경영자(CEO) 세미나에서 SK그룹의 3대 자산을 ▲SKMS(SK경영법) ▲SK브랜드 ▲SK인재로 규정하는 등 인재 중시의 전통이 면면이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는 것이다.
권 실장은 최종현 회장의 인간적인 면모를 묻는 질문에 '육개장 회장님' 일화를 소개했다."최 회장이 92년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으로 근무할 당시 바로 옆 자리에서 점심을 함께 할 기회가 있었다. 대기업 회장과의 점심 식사니까 호텔식 코스요리가 나올 것으로 기대했는데, 막상 등장한 음식은 육개장이었다.
최 회장은 업무에 대해 이것저것 묻다가 내 그릇이 빈 것을 보고는 밥을 한 그릇 더 주문했다. 그러더니 자기 고기를 내 밥 그릇에 얹어주고 김치를 앞으로 옮겨주는 등 자상하게 배려했다."
권 실장은 최 회장과의 첫 대면에서 조카가 큰아버지를 대할 때와 같은 친밀감을 느꼈다고 한다. 그는"최 회장은 열정과 패기를 지닌 인재를 중시했지만, 그 이전에 사람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지닌 분이었다"며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전통이 계속되는 한 SK의 미래는 밝다"고 힘주어 말했다.
장학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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