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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로 여는 아침] 어느 밤의 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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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로 여는 아침] 어느 밤의 누이

입력
2008.08.20 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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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익

한 고단한 삶이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혼곤한 잠의 여울을 건너고 있다.

밤도 무척 깊은 귀가길,

전철은 어둠 속을 흔들리고...

건조한 머리칼, 해쓱하게 여윈

핏기없는 얼굴이

어쩌면 중년의 내 이종사촌 누이만 같은데

여인은 오늘 밤 우리의 동행을 아는지 모르는지

내 어깨에 슬픈 제 체중을 맡긴 채

송두리째 넋을 잃고 잠들어 있다.

어쩌면 이런 시간쯤의 동행이란

천 년만큼 아득한 별빛 인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르자 나는 잠시 내 어깨를 빌려주며

이 낯선 여자의 오빠가 되어 있기로 한다.

전철은 몇 번이고 다음 역을 예고하며

심야의 지하공간을 달리는데...

*

심야의 지하공간에 별이 떴다. 성도 이름도 모르지만 ‘오누이별’이다. 하루 종일 어디서 무슨 일을 하다가 돌아오는 것일까. 창백하게 여윈 여인의 얼굴을 보는 순간, 누이가 떠오른다. 내 누이도 저렇게 일용할 양식을 위해 저자를 떠돌아다니고 있겠지. 그 고운 얼굴에 주름이 잡히도록 고단한 일상에 파묻혀 있겠지.

누이 생각에 낯선 여인에게 베개 삼아 어깨를 빌려준 시인은 과연 어디까지 동행을 한 것일까. 지하철에서 모자란 잠을 자야할 만큼 지칠대로 지친 삶에게 가만히 어깨를 받쳐주고 싶다. 불편한 잠일 망정 잠시나마 편히 쉬라고, 목적지가 다가오는데도 차마 어깨를 빼지 못하고, “천 년만큼 아득한 별빛 인연”을 생각하며 이어지는 레일을 따라가 보고 싶다.

그 레일 위에 별빛이 어린다면, 지하철이 오늘은 은하철도다. 우리는 모두 심야처럼 캄캄한 삶을 레일 삼아 별까지 가는 철도 여행객들이다.

손택수ㆍ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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