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 신냉전'으로 비유되는 그루지야 사태의 정체가 막연하다. 코카서스의 작은 나라를 놓고 미국과 러시아가 정면 대결하는 듯한 양상을 과거처럼 이념 대결로 볼 수는 없다. 석유이권을 분쟁의 중심으로 보기도 석연치 않다. '러시아 제국주의' 규탄도 왜곡된 선전 캠페인의 흔적이 뚜렷하다.
이럴 때는 역사를 되짚는 것도 쓸모 있다. 1995년부터 2003년까지 그루지야 대통령을 지낸 세바르드나제 전 소련 외무장관은 저서 <미래는 자유의 것> 에서 그루지야의 지정학적 숙명을 여러 각도에서 설명하고 있다. 미래는>
동서 갈림길 그루지야의 숙명
그루지야인들은 우리말로 '안녕'이 아니라 '승리'라는 구호를 인사말로 쓴다.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에 있는 지정학적 위치에서 비롯된 외세 침탈에 맞선 투쟁의 역사가 남긴 유산이다. 또 지배층의 탐학에 시달린 민중의 저항의식을 상징한다는 설명이다.
그 근원은 그루지야가 '유럽 기독교 문명의 동쪽 끝'에 위치한 것이다. 그루지야 왕국은 12세기 이래 터키와 아제르바이잔 등 주변 이슬람국가의 위협을 받았다. 생존을 위해 유럽 기독교 제국의 도움을 구했으나 변방의 약소국에 주목한 나라는 없었다. 남은 희망은 북쪽의 기독교 국가 러시아였다. 그루지야는 오랜 '노력' 끝에 1783년 제정 러시아와 수호동맹 조약을 맺었다.
이 동맹으로 그루지야는 명맥을 이었으나 식민지 질곡에 묶였다. 봉건 지주와 제정의 탐학에 농민들의 고통이 컸고 봉기가 잇달았다. 농민들은 늘 검은 펠트 모자에 간편한 옷차림으로 싸울 준비를 갖췄다. 세바르드나제는 "내 어린시절에도 집집마다 총이 있었다"고 회고했다. 공산주의 세력이 발호한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그 대표적 지도자가 조지프 주가슈빌리, 뒷날의 스탈린이었다
1917년 공산 혁명으로 식민 지배에서 해방된 지식인 엘리트 계층은 서구식 사회민주주의 정부를 세웠다. 그러나 이내 붉은 군대의 진주와 함께 소련 공화국으로 편입됐다. 그게 민중에게는 '역사의 순리'였을 수 있다. 그루지야 내무장관 시절 농민을 괴롭히는 부패 척결에 앞장서 고르바쵸프 개혁의 동반자로 발탁됐고 냉전 질서를 허무는 데 기여한 세바르드나제의 역사 인식이다.
그러나 소련 붕괴 직전 고르바쵸프와 결별한 세바르드나제는 독립국 대통령이 된 뒤 친 서구ㆍ친미 노선을 추구했다. 러시아가 추락을 거듭하던 시기, 옛 그루지야가 바라던 서구의 지원에 기댄 것이다. 그 세바르드나제가 러시아가 기력을 되찾던 2003년, 미국이 지원한 민중혁명으로 쫓겨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이 '장미혁명'의 지도자 사카슈빌리는 미 정부 장학생으로 콜럼비아 로스쿨을 나와 세바르드나제 정부에서 일한 인물이다. 그는 집권 후 그루지야를 '자유의 등대'로 칭송한 부시 미 대통령의 세계 전략에 호응, 이라크 다국적군에 영국 다음으로 많은 2,300명을 파견하고 미 군사고문단에 그루지야 군 2만7,000명의 훈련을 맡겼다. 특히 미ㆍ유럽 군사동맹 나토(NATO) 가입을 추진, 국경을 맞댄 러시아의 경계심을 한껏 자극했다.
그러나 사카슈빌리도 부진한 민주화 개혁에 실망한 민심 이반을 겪고 있다. 나토 가입도 러시아의 반발을 우려한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등 유럽의 반대에 가로막혔다. 이런 상황에서 러시아가 사실상 지배하는 분리주의 자치공화국 남오세티아를 느닷없이 침공, 올림픽에 몰두하던 세계를 놀라게 했다.
여론 조작하는 '신냉전' 캠페인
이를 '무모한 오판'으로 보는 것은 순진하다. 러시아의 위협을 부각시켜 나토 가입을 관철하려는 미국의 뜻이 작용했다고 보는 시각은 조금 낫다. 미국 대선 및 이란 정책 등과 관련, 여론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 냉전의 유령이 나타난 듯한 인식을 부추길 뿐이라는 분석은 한층 새겨 들을 만하다. 유럽은 과거에 그랬듯 그루지야를 놓고 러시아와 대결할 뜻이 없으며, 임기 말 부시 정부도 끝내 이를 다툴 의지는 없다는 지적까지 고려하면 '신냉전'은 망령에 불과하다. 덩달아 떠들 게 아니다.
강병태 수석논설위원 btk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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