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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로 여는 아침] 자벌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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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로 여는 아침] 자벌레

입력
2008.08.18 0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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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칠환

재면 잴수록 거리가 사라지는 이상한 측량을 했다고 한다. 나무 밑둥에서 우듬지까지, 꽃에서 열매까지 모두가 같아졌다고 한다. 새들이 앉았던 나뭇가지의 온기를, 이파리 떨어진 상처의 진물을 온 나무가 느끼게 되었다고 한다. 저이의 줄자엔 눈금조차 없었다고 한다.

저이가 재고 간 것은 제가 이륙할 때 열 뼘 생애였는지도 모른다고 한다. 늘그막엔 몇 개의 눈금이 주름처럼 생겨났다고도 한다. 저이의 꿈은 고단한 측량이 끝나고 잠시 땅의 감옥에 들었다가, 화려한 별박이자나방으로 날아오르는 것이었다고 한다. 별과 별 사이를 재고 또 재어 거리를 지울 것이었다고 전한다.

키요롯 키요롯- 느닷없이 날아온 노랑지빠귀가 저 측량사를 꿀꺽 삼켰다 한다. 저이는 이제 지빠귀의 온몸을 감도는 핏줄을 잴 것이라 한다. 다 재고 나면 지빠귀의 목울대를 박차고 나가 앞산에 가 닿는 메아리를 잴 것이라 한다. 아득한 절벽까지 지빠귀의 체온을 전할 것이라고 한다.

(부분 발췌)

눈금도 없는 부정확한 자로 천문학자를 꿈꾸다 죽은 자벌레의 이야기다. 상식 밖의 얼치기 측량사라고 비웃을지 모르겠지만, 자벌레가 재고 간 것은 정작 아파트 평수나 세상의 높고 낮은 키들이 아니다.

“재면 잴수록 거리가 사라지는” 무(無)의 자로 그는 생명을 잰다. 눈에 잘 띄지도 않는 작은 몸을 오므렸다 폈다 살속 깊이 주름이 잡히도록 온몸으로 생명의 온기와 상처를 전한다. 자벌레의 눈금은 사실, 자벌레의 삶이 만든 그 주름이다.

노랑지빠귀의 먹이가 된 뒤에도 자벌레의 꿈은 끊어지지 않고 이어진다. 이제 지빠귀의 피와 살이 되어 생명이 가 닿을 수 없는 절벽까지 체온을 전하는 메아리는 지빠귀의 메아리인가, 자벌레의 메아리인가. ‘열 뼘’ 밖에 안 되는 자벌레의 일생이 잴 수 없는 아득한 우주다.

손택수ㆍ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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