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 하길종은 대단한 별종이었다. 허약했지만 깡다구였고 정말 용기있는 사람이었다. 내가 그에게 미안한 것은 그가 평생토록 맞기만 한 것을 막지못했다는 것이다. 얼굴과 가슴은 늘 멍투성이였다. 동네건달들이, 영화감독들이,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비쩍 마른 그의 몸뚱이를 시도 때도 없이 후려쳤다.
어느 늦은 밤, 돈암동 파출소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하감독을 데리고 가라는 것이었다. 허겁지겁 달려갔더니 형은 피투성이가 되어 나무의자에 찌그러진 얼굴로 누워 있었다. “허허...내가 늙었나봐. 센팅을 치고 두발로 날랐는데 발이 그냥 잡히데.” 10대 때 그는 이소룡 찜쪄먹을 정도로 빨랐다. 내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늙긴, 술 때문에 그렇지. 저번엔 기똥차게 날랐잖아...” 길 가던 여학생을 깡패들이 희롱하는 것을 보고 참지 못해 옛 기예를 믿고 혼을 내주려다 오히려 ‘작살’이 난 것이다.
한국영화진흥조합(현 영화진흥위원회)에서 국제영화제출품작으로 <설국> 을 선정한 적이 있다. 형이 정면으로 출품작 선정이 잘못되었다고 일간지에 두들겼다. 일본 원작을 원작자 승인도 없이 영화화하여 한국영화의 대표작이라고 세계영화제에 내놓는 것은 수치라는 것이었다. 문공부가 발칵 뒤집어졌다. 설국>
국제영화제 출품규약과 국제저작권문제 등을 조사, 결국 출품작이 교체되었다. <설국> 을 연출한 감독이 집으로 득달같이 찾아와 멱살을 잡았다. “야, 이 새끼야. 너는 감독 아니야? 왜 다 된 밥에 재를 뿌려!” 형은 직사하게 두들겨 맞았다. 형은 “쪽바리 것도 좋지만 우리 것도 좋은 게 많다”며 치는 대로 맞아주었다. 설국>
엉터리 영화를 보고도 그냥 있지 않았다. 세계적 감독 작품이든 인기 감독 작품이든 엉터리영화는 “볼 가치도 없다”고 신문 영화평에 신랄하게 까 버렸다. 수입영화사 직원들과 감독들 주먹이 그를 그냥 둘 리 없었다.
대학 때 친구 K씨가 중앙정보부원으로 영화검열을 하고 있었다. K씨는 형을 매우 좋아하였다. 그런데 형은 그에게 “독재정권의 개가 되느니 차라리 목숨을 끊으라”고 독설을 퍼부었다. K씨는 참다 못 해 맥주병을 깨 형의 얼굴을 그어버렸다. 그런 일이 있은 지 얼마 후 미국에서 편지 한통이 날아왔다. K씨가 보낸 편지였다.
K씨는 그 사건 이후 사직을 하고 새로운 세계로 떠난 것이었다. K씨는 편지에서 그에게 상처를 준 것에 대하여 사과하며, 역사적 죄의식 속에 살고 있던 자기의 상처를 그가 치료하여 주었다고 했다.
하길종의 용기는 끝이 없었다. 수많은 역경을 넘어 마침내 <바보들의 행진> 의 촬영을 마쳤다. 시나리오에도 없는 장면을 하감독이 찍고 있다고 충무로에 소문이 파다하게 나 있었다. 중앙정보부원들이 촬영한 필름을 보려고 혈안이 되어 현동춘 편집실을 드나들었다. 바보들의>
그러나 그곳에는 필름 조각 하나 없었다. 하감독은 필름을 송두리째 들고 미아리 한 구석진 여관에 숨어 작가 최인호, 음악감독 송창식, 편집기사 현동춘 등과 편집을 하고 있었다.
하감독은 언제나 모험을 즐겼다. 음악에서도 그의 도전은 계속되었다. 영화음악을 전혀 접해 보지 않았던 천재적 음악가들을 영입하였다. 첫 번째 영화 <화분> 때는 최첨병 음악귀재 신중현, 두 번째 영화 <수절> 에선 가야금의 명인 황병기, 이번 <바보들의 행진> 에선 송창식에게 음악을 맡겼다. 바보들의> 수절> 화분>
송창식의 천재성은 즉각 나타났다. ‘장발족 경찰’이 ‘장발족’을 쫓는 장면을 보자 기타 줄을 뜯으며 바로 “왜 불러, 돌아서서 가는 사람 왜 불러어 ”를 불러제꼈다. 이어 ‘영철이 고래를 잡으러 동해로 가는 장면’에선 주먹을 불끈 쥐고 일어나 “자, 떠나자! 동해바다로!”를 부르기 시작했다. 역시 송창식이었다. <왜 불러> , <고래사냥> 두곡은 이렇게 간단히 작곡됐다. 고래사냥> 왜>
그러나 시간이 가면서 하감독 얼굴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회색빛으로 죽어 있는 대학캠퍼스를 배경으로 한 주제음악이 나오지 않는 것이었다. 송창식은 며칠 밤을 새우며 오선지를 채웠다간 찢었지만 음악이 화면을 타지 못하고 있었다.
한 달이 지나갔다. 하감독이 또 증발하였다. 모두가 그를 찾아 나섰다. 하감독은 대학가에 있었다. 휴교한 캠퍼스 근처 술집과 다방에 쭈그리고 앉아 대학생들의 고뇌에 찬 모습에서 흘러나오는 말과 노래를 찾고 있었다. 마침내 신촌 한 막걸리 집에서 학생들이 웅얼거리는 노랫가락을 잡아냈다. 들고 있던 그의 막걸리 잔이 스르르 내려졌다. “바로 저 소리다. 저 노래다.”
그는 즉각 작곡자를 찾았다. 연세대 국문과 학생 김상배였다. 미아리 좁은 여관방, 대학캠퍼스 장면 위로 김상배의 기타 소리와 노래가 흐르기 시작했다. “캠퍼스 잔디 위에, 또다시 황금물결. 잊을 수 없는 얼굴, 얼굴...” 숨죽이고 있던 사람들이 서로를 껴안고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날이 갈수록> 으로 테마곡이 잡히자 즉각 한양녹음실에서 하룻밤을 새고 사운드필름을 세방 현상소로 옮겼다. 마침내 프린트가 검열기관에 운송됐다. 날이>
남산 영화검열위원회에서 중앙정보부원과 보안사령부 검열관들이 눈을 뒤집고 필름을 보는 동안 하감독은 검열도 안 된 ‘감독버전’으로 단성사 시사실에서 주요 스태프, 가까운 기자들과 영화평론가들을 모아 기술시사회를 열었다. 신체검사 장면부터 시작되는 영화는 심상치 않았다.
사람들을 때로는 폭소로 때로는 냉소로, 분노로, 그리고 신바람으로 박수를 치게 했다. 마침내 영화의 엔드 자막이 나왔다. 모두의 손에 땀이 가득했다. 모두, 무엇을 해낸 기분으로 일어나 하길종을 찾으며 끊임없이 박수를 쳤다.
그러나 어디에도 하길종은 없었다. <검열불가> . 국도극장에 그려진 간판이 내려졌다. 제작자와 가족들이 동분서주, 두 사람을 찾아 나섰다. 형이 악명 높은 중앙정보부 남산분실에 잡혀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줄을 있는 대로 동원하였다. 며칠 후 새벽, 남산분실 철문이 열리고 두 남자가 남산 길을 터벅터벅 내려오고 있었다. “형, 얼굴이 그게 뭐야. 나처럼 고분고분 하면 안 맞잖아.” 검열불가>
최인호가 팅팅 부은 하감독의 얼굴을 보며 익살스럽게 말했다. “허허... 다 그런 거 아니 갔소.” 두 사람은 서로 어깨를 껴안고 충무로 거리로 내려가고 있었다. 노란 안개등이 새벽 봄비에 젖은 그들의 등을 밝히고 있었다. 아침이 밝아오자 국도극장 미술부가 급히 창고로 달려갔다.
마침내 <바보들의 행진> 의 간판이 걸렸다. 제작자가 검열기관에 손을 써서 30분 분량의 필름을 삭제하고 재 검열을 받아낸 것이었다. 대학생들이 소문을 듣고 몰려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열광하기 시작했다. 바보들의>
한국의 젊은이들이 ‘작살난 영화 - 바보들의 행진’을 바보처럼 웃고, 눈물을 흘리며 보고 있었다. 하길종, 그는 바바리 깃을 세운 채... 맨 담배를 문채... 그 모습을 먼발치에서 보고 있었다. 우리들의 <바보들의 행진> 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그는 말하지 않았다. 바보들의>
아침 지하철 훈남~알고보니[2585+무선인터넷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