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지육림에 빠져 실정을 거듭한 폭군, 사사로운 정으로 사화를 일으키고 신하들을 도륙한 임금. <조선왕조실록> 과 이에 근거한 기록들이 묘사하는 연산군(재위 1494~1506)의 모습이다. 현대의 TV사극이나 영화 등에서도 연산군을 바라보는 시각은 이런 틀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
하지만 재독 사학자 변원림(60)씨는 최근 펴낸 <연산군 그 허상과 실상> (일지사 발행)에서 연산군은 폭군이 아니라 신하들과의 권력투쟁에 패퇴한 군주라며 연산군을 위한 '변명'을 시도한다. 연산군>
변씨는 연산군을 몰아낸 이들의 구미에 맞게 서술한 <조선왕조실록> '연산군일기'의 신빙성을 회의하면서 그 내용의 모순점을 비판한다. 조선왕조실록>
그에 따르면 실록에는 연산군이 이극균의 아들들을 죽였다는 기사가 나왔다가 나중에 이들에게 명령을 내렸다는 앞뒤안맞는 기사가 등장하기도 하고, 딸 휘순공주의 결혼과 관련된 2개의 기사에 기록된 쌀의 수치가 큰 차이가 나는 등 부정확한 기술이 상당하다.
실록에 "전하가 동궁으로 계실 때 서연을 조금도 폐한 일이 없어 삼경과 사서를 모두 읽었다"는 기록이 나오는데도 후대로 갈수록 연산군을 공부에 흥미가 없었던 왕세자로 폄훼하는 기록도 쏟아진다는 것이다.
또 저자는 연산군의 사치를 과장하는 기록도 작위적이고 상투적이라고 분석한다. 가령 실제로 누각을 세울 만한 장소가 없는 창경궁 후원에 1,000명이 앉을 만한 서총대라는 누각을 세웠다는 기록이나, 경회루 앞 연못에 3개의 섬을 만들었다는 기록 등은 연산군을 모함하려는 목적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연산군의 폐위는 여진의 발호와 왜구의 침입 등 국방 불안에 대비한 연산군의 변경 축성사업, 군역을 늘리기 위한 공신 소유 노비에 대한 조사 등에 반발한 성리학자들과의 권력투쟁에서 패배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그는 "연산군이 왕권 강화에 성공해 자기의 이익만을 위하는 이기적인 양반들을 제어하고 국방정책을 완성했으면 임진왜란을 방비할 수 있었을 것"이라며 "성리학자들이 자신들의 말에 순종한 용렬한 군주만을 성군으로 칭송하는데 비해, 연산군이 폭군의 이름을 받는 것은 오히려 그의 대왕다왔음을 알리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왕구 기자 fab4@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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