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은퇴한 영국 맨체스터 유나이트 축구 팀의 공격수 올레 군나르 숄사르는 국내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박지성을 이렇게 평가했다. "그는 누구보다 성실하고, 열심히 노력한다. 그러나 한 가지 아쉬운 점은 그의 발목이 유연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의 말을 듣는 순간, 고등학교 시절 모교에 잠깐 만들어졌다가 곧 없어진 축구부 생각이 떠올랐다. 삼 년 남짓 활동하다가 해체된 축구부였다.
'선택의 기회' 준 교장선생님
축구부 결성을 주도적으로 이끈 분은 교장 선생님이었는데, 그의 운영 철학이 좀 남달랐다. 훈련을 핑계로 수업시간을 빼먹어선 절대 안 되고(보충수업시간이나 야간자율학습시간을 이용하라는 말씀이었다), 중학생을 상대로 스카우트를 해서도 안 되며(그러니까 재학생 중에 선발하라는 말씀), 합숙을 해서도 안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압권은 운동장을 독점적으로 사용해선 안 된다는 규정이었다.
따라서 학생들이 운동장을 가장 많이 사용하는 점심시간이나 방과 후 한 시간 동안, 축구부원들은 그냥 가만히 앉아서 '쭈쭈바' 같은 것을 빨고 있어야만 했다. 그러려면 왜 축구부를 만드셨어요, 항의하는 학생에게 교장선생님은 뚱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네들이 만들어달라며?
그렇게 훈련한 축구부는 도 대회 예선전에 나갈 때마다, 과연 '골망'의 내구성 한계는 어디까지일까 시험이라도 하듯, 참담한 스코어로 연전연패를 거듭했다. 친구를 응원하러 경기장에 찾아갔던 재학생들은 모두 시무룩해졌지만, 교장선생님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보였다. 그리고 어느 월요일 조회시간인가, 교장선생님은 축구부원들을 연단 앞에 쭉 불러 세워놓고 이런 요지의 말씀을 했다(그러니까 내가 지금껏 잊지 않고 있는 말씀이었다). '뭘 자꾸 이루려고 하지 말고요, 뭘 자꾸 해보려고 노력합시다. 여러분 나이엔 그게 맞아요. 그러니, 이 앞에 나와 있는 학생들에게 모두 박수!'
교장선생님 말씀처럼 '뭘 자꾸 해보려고' 했던 친구들은 그 후 기계공학과나 경영학과, 체육교육과에 진학했고, 또 몇 명은 자동차정비 자격증, 대형버스운전면허증을 땄다. 딱 한명, 특기생으로 지방대학교 축구부로 진학한 친구도 있었다. 후에, 그 축구부 생각을 다시 해보니, 그때 교장선생님이 우리에게 준 것은 바로 '선택'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좀 더 자세히 말해 '선택'의 폭을 넓혀주었다는 것. 퇴로를 막아놓지 않고 직접 가본 다음 스스로 결정하라는 뜻. 그것이 십대들에겐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그 시기를 지나온 사람들은 다 알 것이다. 교육이란 사실 선택의 기회를 주는 것과 다름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숄사르는 박지성이 어떤 환경에서 축구를 배웠는지, 전혀 짐작조차 못했을 것이다. 전국대회 4강에 들어야만 진학이 가능한 환경에서, 발목의 유연성은 무슨. 문제는 조직력이고, 경쟁에서 이기는 것뿐이다. 창조적으로 골을 넣을 필요는 없다. 골만 넣으면 그만이다. 그러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남들 공부할 때 축구하고, 남들 점심 먹을 때 축구해야 한다. 초등학교 때부터 대학교 때까지 회의도 품지 말고, 그냥 쭉 나가야 한다. 그게 이 땅에 태어난 축구 선수들의 운명이다.
경쟁과 성취에 매달린 교육
교육과학기술부에서 학교별 학업성취도 결과를 3등급으로 나누어 공개하겠다고 발표했다. 이 나라 교육정책은 이제 학원 스포츠의 길과 똑같은 보폭으로 걸어나갈 작정을 한 것 같다. 학문을 무슨 고기 등급 매기듯 측정하려는 것도 우습지만, 자꾸 아이들의 퇴로를 차단하려고 안달하는 것만 같아 마음이 씁쓸하다. 어린 나이에 선택이 사라지면 그 다음엔 무엇이 오겠는가? 아이들이 너무 이른 나이에 환멸부터 알게 될까, 그것이 참으로 걱정된다.
이기호 소설가·광주대 문예창작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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