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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 60년, 대표 기업의 성공DNA] <2> 품질로 승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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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 60년, 대표 기업의 성공DNA] <2> 품질로 승부한다

입력
2008.08.18 0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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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 승용차라고는 귀족들이나 조선총독부 국장들 소유 10여대, 도지사 한 대, 일본군 사단장급, 그리고 몇몇 은행 등이 보유하고 있는 몇 대뿐이었다. 차가 귀한 시절이다 보니 고장이 났다 하면 모두들 어쩔 줄 모르고 쩔쩔 매기가 일쑤였다.

당시 자동차공업사들은 대부분 '긴 시간이 걸린다'며 큰 돈을 받았는데 우리 아도서비스는 다른 데서 열흘 걸리는 것을 단 3일만에 수리해 주고 대신 그들보다 더 많은 돈을 받았다. 그래서 몇 안 되는 승용차들이 모두 우리 공장으로 몰려오기 시작했다."(고 정주영 회장 회고록 <이 땅에 태어나서> 에서)

일제 점령기인 1940년. 새 사업을 궁리하던 25살의 청년 정주영은 동업자 두 사람과 자동차 수리공장 '아도서비스'를 인수했다. 정주영은 이 시절 자동차 사업의 미래 가능성에 주목했고, 그것은 60여년 뒤 세계 5위의 자동차그룹 현대ㆍ기아차 탄생의 모태가 됐다.

50여년 한국자동차산업의 발전사에서 현대ㆍ기아차, 특히 현대자동차주식회사의 역할은 절대적이다. '대한민국호(號)'가 보릿고개를 넘고 산업 대국으로 급성장한 버팀목이 된 것도 자동차 산업이었다.

일찌감치 독주 체제를 구축한 현대ㆍ기아차는 2만여개 달하는 부품 협력업체의 동반 성장을 이끌며 국내 산업화의 일등공신으로 자리매김했다.

현대ㆍ기아차의 이런 성과에 힘입어 2004년 국내 자동차 업계는 수출 1위, 무역흑자 1위, 일자리 창출 1위의 산업으로 성장했다. 우리나라 총 수출의 12.8%, 제조업 생산의 11.1%, 고용의 8.0%를 점유하는 거대 산업이 됐다.

조그만 수리업체에서 출발한 현대ㆍ기아차가 세계 굴지의 자동차 메이커로 도약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일까. 그것은 '품질'에서 시작해서 '품질'로 끝나는 '품질 중심의 경영철학'이었다.

■ 오명으로 시작한 현대차

아도서비스로 자동차와 인연을 맺었던 정주영은 1967년 12월 지금의 현대자동차를 설립해 미 포드사와 기술제휴를 맺고 첫 차 '코티나'를 조립ㆍ생산했다. 하지만 애프터서비스가 부족한 데다 품질도 좋지 않다는 악소문까지 돌면서 코티나 반납소동이 전국 각지에서 일어났다.

당시 '현대차는 똥차'라는 오명까지 얻었다고 한다. 제대로 된 경험이 없다 보니, 조립ㆍ생산 조차도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하지만 정주영은 자동차산업은 어떤 일이 있어도 반드시 성공시킨다는 신념 하에 품질이 모든 것임을 이때 깨달았다. 현대차 '품질 제일주의의' 출발이다.

정주영은 1970년 독자모델 개발에 나서 76년엔 우리나라 최초 독자모델인 '포니'를 탄생시켰다. 하지만, 탄탄대로일 수만은 없었다. 빠른 손놀림으로 많은 차를 만들어냈지만, 한계는 분명했다.

1986년 액셀로 자동차 본 고장 미국시장에 화려하게 데뷔했으나 쏘나타(1989년), 엘란트라(1991년)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미국시장에서의 '저품질ㆍ싼차'라는 인식은 현대차를 통째로 흔들고 있었던 것이다.

'품질경영'을 바탕한 현대차의 제2도약은 정몽구 회장 취임 이후다. "미국 딜러들이 정 회장을 만나 '좋은 차를 만들어 달라. 못 팔아 먹겠다'며 아우성이었다. 당시 정 회장이 받은 충격은 매우 컸던 것 같다."

1999년 현대차 회장으로 취임한 정몽구 회장의 미국 방문을 수행했던 관계자는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신차가 출시된 지 적어도 6개월 정도는 지난 다음에 사라"는 말까지 나돌 정도였다. 초기 품질이 안 좋아 출시 이후 '제품 보완'이 이뤄지는 것을 소비자들이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과거 현대정공(현 현대모비스)과 현대자동차써비스 경영을 통해 품질의 중요성을 모르는 것이 아니었지만, 이 정도까지는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미국에서 돌아온 정 회장은 자동차시장에 영향력이 가장 큰 J.D. 파워에 컨설팅을 받도록 곧바로 지시했다.

■ '품질 우선'으로 미래 도약

정 회장은 아울러 설계 생산 영업 애프터서비스를 '품질'의 눈에서 직시할 수 있는 현대ㆍ기아차 품질본부를 발족시켰다. 매월 품질 관련 회의를 직접 주재해 신차의 기획, 설계, 생산 등 모든 단계별로 일정 수준 이상의 품질이 확보되지 못할 경우, 다음 단계로 나아가지 못하도록 했다.

현대차 '품질 제일주의 철학'은 이렇게 발전했고 현대차가 '싼 차'에서 '질 좋은 차'로 바뀐 시점 역시 바로 이때다.

당연히 J.D. 파워의 품질 평가 순위는 해가 갈수록 쑥쑥 올라갔다. 바닥권을 맴돌던 품질조사(판매 후 3개월 이내 평가)가 2006년에는 1위까지 상승했다. 내구품질조사(판매 후 3년 전후)의 경우 올해 6위로 올라서는 등 현대차는 이미 품질면에서 세계적인 수준으로 인정받고 있다.

정 회장의 '품질 제일주의' 일화 하나. 기아차 오피러스 수출을 앞둔 2003년 8월, 정 회장은 그룹 기술의 메카인 남양연구소를 방문해 주행시험장에서 오피러스를 몰고 몇 바퀴를 돌았다.

이때 'Whine Noise'('윙'하는 미세 소음)를 확인하고, 기술진에게 개선을 요구했다. 당시 결국 이 소음을 잡기 위해 일정보다 수출이 40여일이 늦어지는 사태까지 발생했지만, 결국 모두 '품질' 앞에서 무릎을 끊어야 했다.

정 회장의 진정한 품질 경영은 이제 시작이라는 말도 나온다. 투자 확대를 통해 글로벌 경영에 박차를 가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만큼 현대ㆍ기아차의 또 다른 도약을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그린카로 세계4대 강국'이라는 새정부의 '녹색성장' 목표 역시 현대ㆍ기아차에게는 기회다. 품질 경영을 앞세워 새로운 도전에 나설 정회장의 '큰 걸음'이 주목되는 이유다.

● '34년 현대차맨' 김관헌 과장 "직원들 제품 열정이 도약 이끌어"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였던 것 같습니다. 지금의 본관(울산 현대) 자리는 태화강과 울산만이 만나던 포구였습니다. 갈대밭 사이로 돗단배가 지나가던 곳이죠. 이렇게 변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현대자동차 울산공장에서 만 34년간 근무한 김관헌 과장(58ㆍ사진). 그의 기억 속에 현대차의 역사는 자신의 인생역정과 같다. 되돌아보면 모든 것이 주마등처럼 지나가지만, 참으로 긴 시간이기도 했다.

현대자동차가 울산에 첫 공장을 건설하던 1967년. 당치 초라한 공장을 보고 누구도 현대차가 세계 5위의 자동차 생산기업으로 등극할 줄 몰랐다. "당시 정말 보잘 것이 없었습니다. 공장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할 정도였지요. 하지만, 직원들의 열정은 대단했습니다."

김 과장은 자신이 입사했던 1974년 직원이 1,800명 정도라고 했다. 전 직원이 매월 모여서 월례조회를 했고, 일하는 것이 전부였던 시대였다고 한다. "당시 취업하기가 지금보다 휠씬 어려웠습니다. 전국 각지에서 현대차 입사하겠다고 울산으로 몰려올 정도였으니까요."

정년을 2년 가량 앞둔 김 과장에게 현대차는 이제 인생의 모든 것이 돼버렸다. 장성한 자식들(2녀1남) 모두를 '현대차'로 공부시키고 결혼시켰다. 자식들 대부분은 아직도 현대차와 인연을 맺고 있다.

초등학생 자녀를 두고 있는 맏딸(36)은 현대차 울산공장에 다니고, 막내 아들(33)은 현대차 협력업체에서 일한다. 장 과장은 "이제는 손자들 재롱 보는 맛에 산다"며 기뻐했다.

그렇다고 즐거움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1997년 불어닥친 외환위기는 큰 시련을 불러왔다. 선후배와 동료 직원들이 하나둘씩 회사를 떠나야했다. 나가는 직원들의 가슴도 찢어졌지만, 남아있는 직원들도 힘들긴 마찬가지였다.

"회사가 잘 돼야 고용보장이고, 행복지수를 논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당시에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정 과장은 초급관리자다. 현장근무를 30년 넘게 한 만큼 노조원들의 생각을 누구보다 잘 안다.

하지만 그는 최근 노조가 사측의 중앙교섭 참여를 조건으로 내건 정치적 파업에 대해 '민감한 문제'임을 인식한다면서도 바람직하지 않다는 점을 강조했다.

후배들에게 당부하고 싶다는 것도 같은 맥락의 얘기다. "사람은 계속 바뀌지만 기업은 영원한 것 아니겠습니까. 기업이 지속적으로 발전해야, 후손들도 계속 좋은 일자리를 갖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려면 결국 회사를 좀 더 생각하는 문화가 필요합니다."

누구도 생각지 못했던 현대차가 세계 5위로 도약한 '불가사의'에 대해 김 과장은 '최고 제품을 만들겠다'는 의지가 중요하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매출 30조원(2007년말 기준), 영업이익 1조8,000억원의 초대형 기업으로 성장하기까지는 '품질'이 최고의 가치였다는 얘기다.

오너의 기업경영에 대한 뜨거운 열정도 김 과장이 바라본 현대차 성공요인 중 하나다. 고 정주영 회장을 먼발치에서 지켜봤다는 그는 '근검절약'을 외치며 공장 구석구석을 다니는 고 왕 회장의 모습에 반했고, 바통을 이어받아 공장을 누비는 정몽구 회장을 보면서 "현대ㆍ기아차의 더 큰 미래를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박기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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