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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하필(何必)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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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하필(何必)현상

입력
2008.08.12 0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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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년 전의 일이다. 보건사회부(지금 보건복지가족부) 출입기자 몇 명이 건강보험을 시찰하러 공무원들과 함께 일본에 갔을 때다. 양국의 공식 면담행사에서 우리 대표단의 실무책임자인 과장이 엉뚱한 실수를 했다. 행사장 밖 커피 테이블 위에 꽂아 놓은 소형 태극기가 거꾸로 돼 있다고 호텔직원에게 고치게 한 것이다. 그는 태극기의 파란 색이 위로 가야 한다고 말했다. 하늘은 위에 있는 거고 파란 색이다, 그런 주장이었다. 옆에서 지켜보다가 놀라 직원을 말렸다. 서기관쯤 되는 사람이 어떻게 그런 것도 모를까 의아스러웠다.

▦ 태극기는 사실 그리기 어렵고 태극과 괘(卦) 효(爻)에 담긴 철학을 잘 아는 사람도 드물다. 한자를 안 쓰다 보니 태극 문양을 문향이라고 표기하거나 괘를 궤(軌)로 알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광복절 3ㆍ1절 같은 때 각급 학교나 단체가 태극기 그리기 행사를 하는데 그때 뿐이다. 3년 전의 통계지만 네티즌 500여 명을 조사한 결과 보지 않고도 태극기를 그릴 수 있다는 사람은 60%를 겨우 넘었다. 잘 모른다거나 관심 없다는 비율을 합치니 10% 이상이었다. 사우디 아라비아나 부탄처럼 훨씬 어려운 국기도 있다면 할 말이 없지만.

▦ 베이징 올림픽 여자핸드볼 첫 경기가 열린 9일, 이명박 대통령이 거꾸로 된 태극기를 들고 응원을 했다. 비난이 일자 포털 등의 사진에서는 태극기를 잘라내 안 보이게 했다. 청와대는 “현지 응원단으로부터 10개 가량 조달했는데 하필 거꾸로 된 것이 전달된 것 같다”고 말했다. 지난해 2월에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남미 순방 전용기에 태극기가 거꾸로 달리고, 넉 달 뒤에는 한 포럼의 축하 메시지 영상에 대통령 옆의 태극기 문양이 잘못된 것이 드러나 비난을 산 일이 있다. 성격은 다른 정권에 대를 이어 같은 일이 생긴 셈이다.

▦당시 한나라당 대변인은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며 ‘노 대통령의 나라와 헌정질서를 가볍게 여기는 태도’를 비난했는데, 이 대통령이 그 비난을 고스란히 되받았다. 대통령은 잘못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매사 다지고 따지고 되짚는 시스템이 없는 게 문제다. ‘하필이면’은 ‘어찌하여 꼭 그렇게’, ‘다른 방도도 있는데 왜’라는 뜻이다. 누가 어떤 돈으로 태극기를 제작했든 발주할 때, 납품 받을 때, 대통령에게 전달할 때 등 잘못을 점검할 수 있는 계제와 기회는 여러 번 있었다. 그런데 왜 하필 이 대통령에게 이런 일까지 생기는 것일까.

임철순 주필 yc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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