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길었던 여정이었다.
1989년 9월27일생 박태환. 만 18년 10개월을 살아온 청년 박태환에게 지난 1년6개월은 인생을 바꾼 전환점과도 같았다. 한국 수영 사상 처음으로 세계수영선수권 우승을 차지했던 그 순간부터 시작된 박태환의 길고 짧았던 1년6개월은 ‘올림픽 금메달’이라는 클라이막스를 꽃피웠다.
▲ 세계 수영사의 중심으로
2006년 도하아시안게임에서 3관왕에 오른 박태환은 그저 아시아의 강자일 뿐이었다. 세계 수영계에서 아시아는 철저한 변방에 불과했다. 일본의 기타지마 고스케가 평영에서 최강자 자리를 지키고 있지만, 기교를 앞세운 평영과 달리 자유형에서 아시아 최강은 그저 우물 안의 개구리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세계 수영계를 한국의 18세 소년이 발칵 뒤집어 놓은 것은 지난해 3월 멜버른 세계수영선수권이었다. 모두가 호주의 ‘수영 영웅’ 그랜트 해켓(28)을 주시하고 있던 남자 자유형 400m. 그러나 터치패드를 가장 먼저 찍은 선수는 태극마크를 선명히 새긴 한국의 18세 소년, 박태환이었다. ‘수영 천재’ 박태환이 세계 수영 무대에 자신의 이름 석자를 알리는 순간이었다. 박태환은 방심하거나 들뜨지 않았다. 5개월 만의 재대결. 박태환은 같은 해 8월 일본 지바에서 열린 프레올림픽에서 다시 한번 해켓을 눌렀다. 그렇게 박태환은 베이징올림픽 남자 자유형 400m의 가장 강력한 우승후보로 자리매김했다. 그리고 4개월 후, 박태환은 호주-스웨덴-독일로 이어지는 쇼트코스 월드컵에서 3개 대회 모두 3관왕을 차지하며 ‘괴물’이라는 별명을 새롭게 추가했고, 해켓은 “베이징올림픽에서 400m 금메달은 박태환이 차지할 것”이라고 공언했다.
▲ 전담팀의 해체, 끝없는 추락
지칠 줄 모르는 전진을 계속하던 박태환에게도 시련은 찾아왔다. 한국 수영 사상 최초로 스폰서의 책임 아래 전담팀을 꾸린 게 결국 문제가 됐다. 그러나 태릉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수영에만 전념하던 18세 소년에게 바깥 세상은 생소했다. 지난 1월, 박태환 전담팀은 재계약 과정에서 연봉 인상률에 의견차를 보이며 결국 해체됐다.
올림픽을 앞둔 중요한 상황, 박태환은 나홀로 훈련에 나서는 등 겨우내 극심한 혼란을 겪었다. 각종 행사에 불려 다녔고, 연예인과의 스캔들에 시달렸다. 제대로 된 훈련이 불가능했다. 힘들게 끌어올렸던 지구력은 와해됐고, 기록은 끝없는 내리막길을 걸었다.
지난 3월 제주에서 열린 한라배 수영대회에서는 자신의 기록에 한참 못 미치면서 올림픽 금메달 전선에 먹구름이 드리워졌다. 해켓을 비롯한 경쟁자들이 앞다퉈 개인 최고 기록을 경신하고, ‘수영 황제’ 마이클 펠프스(미국)가 자유형 400m 출전을 고려하던 시점이었다.
▲ 태릉 복귀, 6개월의 지옥훈련
2월말 박태환은 다시 짐을 쌌다. 그 동안의 모든 일을 잊고 자신을 길러준 노민상 국가대표팀 감독의 품으로 돌아왔다. 외박도, 휴일도 마다했다. 하루에 1만5,000m씩 묵묵히 물살을 갈랐다. 결국 태릉 복귀 50여일 만인 지난 4월 동아수영대회에서 박태환은 3분43초59의 개인최고기록이자 아시아신기록을 수립하며 화려한 복귀를 알렸다. ‘훈련 부족이다’ ‘지구력이 완전치 않다’며 우려의 눈길을 보내던 주위의 싸늘한 시선을 단숨에 일축 시키는 투혼의 역영이었다. 박태환은 그제서야 “이제 여유를 갖고 훈련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세계기록(3분40초08)을 목표로 다시 최선을 다하겠다”며 희미한 미소를 띄울 수 있었다.
이후 박태환은 올림픽 금메달을 향해 매진했다. 노 감독과 송홍선 체육과학연구원 박사의 치밀한 훈련 스케줄에 맞춰 서서히 기록을 끌어올렸다. 그리고 2008년 8월10일. 박태환의 ‘올림픽 금메달 프로젝트’는 모두가 바라던 해피엔딩으로 화려한 축포를 터뜨렸다.
베이징=허재원 기자 hooa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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