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 독일의 독재자 아돌프 히틀러의 시신이 1년여 동안 9차례나 매장과 발굴을 거듭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러시아 주간지 노보예 브레먀 최신호와 유력 일간지 이즈베스티야는 베를린을 함락시킨 구소련군의 극비 자료 등을 인용해 히틀러의 시신 행방에 관해 잇따라 보도했다..
이들 매체에 따르면 1945년 4월25일 소련군은 베를린을 완전 포위했을 당시 히틀러의 전용 벙커에는 그와 연인 에바 브라운, 심복인 요제프 괴벨스 가족 등 7명이 머물렀다.
1945년 4월30일 새벽. 히틀러가 자살하면 시신을 묻을 준비를 하라는 비밀 명령이 하달됐다. 무덤은 총통부 영내에 있는 대형 포탄 구멍이 선택됐고 휘발유 200l를 가져 오라는 지시도 내려졌다.
이날 점심식사 후 히틀러는 주위를 물리치고 수명의 측근들만 남게 했다. 히틀러와 브라운, 측근들이 악수를 나누며 작별인사를 대신했다. 히틀러와 브라운은 방으로 들어갔고 오후 2시30분 한 발의 총성이 울렸다. 히틀러의 오른손에는 구경 7.65mm 권총이 쥐어져 있었다. 멀지 않은 곳에 브라운의 6.35mm 권총도 놓여 있었으나 그는 이를 사용치 않고 독약을 택했다.
이날 저녁 친위대원들은 히틀러와 브라운의 시신을 총통부 정원으로 옮겨 깊이 1m의 구덩이에 넣고 화장하려 했다. 현장에는 괴벨스 등 나치 고위 지도자들이 모였다.
하지만 소련군의 포격이 떨어지는 급박한 상황이 전개되면서 나치 지도자들은 히틀러의 화장을 지켜볼 수 없었다.친위대원들은 히틀러와 브라운의 시신을 미리 준비된 무덤으로 운반했고 유언에 따라 애견들과 함께 합장하고 떠났다.
다음달 2일 베를린을 점령한 소련군은 사흘 뒤인 5일 밤 시신을 발굴, 히틀러와 브라운의 턱뼈를 제외한 나머지 유골을 매장했다.
8일에는 독일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 제2차 세계대전이 종료됐고 소련군은 베를린을 떠나 주둔지를 이동하면서 히틀러와 브라운의 시신을 이장했다.
18일 소련군 총사령부는 특사를 파견해 시신을 발굴한 뒤 턱뼈들은 모스크바로 보냈고 나머지는 매장했다. 이후에도 소련군의 이동에 따라 유골도 계속 옮겨졌다.
1946년 5월 소련 내무부는 3명으로 구성된 전담팀을 만들어 히틀러 시신을 재차 감정했다. 전담팀은 독일까지 방문, 히틀러의 지하벙커와 총통부 정원에 대한 현장조사를 실시했다.
노보예 브레먀는 히틀러의 유골이 유리 안드로포프 전 당서기장의 국가보안위원회(KGB) 의장 재직 당시인 1970년 모두 소각 처분됐다고 소개했다.
그러나 이즈베스티야는 지난 5일 러시아 문서보관소 부소장을 인용해 모처의 보관소에 히틀러의 두개골 일부가 남아 있으며 이중에는 권총자살 때 탄환구멍이 난 관자놀이뼈가 포함돼 있다고 전했다.
한성숙 기자 hans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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