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손호철 교수 대장정 길을 가다] <16> 중국판 12·12사건 : 시안사변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손호철 교수 대장정 길을 가다] <16> 중국판 12·12사건 : 시안사변

입력
2008.07.31 01:17
0 0

장쉐량(張學良)은 만주군벌의 아들로 아버지가 암살을 당한 뒤 만주를 물려받았으나 일본이 만주를 침공하자 20만 병사를 데리고 남쪽으로 내려왔다. 장제스(蔣介石)의 신임을 받은 그는 이후 시안(西安)의 사령관으로 파견되어 30만 군대를 지휘하고 있었다.

자신의 영토를 잃은 일 때문에 강력한 항일주의자였던 그는 국민당군이 휴전하고 공산당과 손을 잡아 일본과 싸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는 장제스 몰래 홍군과 밀사를 주고받았고 홍군에게 우호적 자세를 보였다.

당시 홍군은 장정을 끝내고 옌안(延安)에 자리잡고 있었지만 그 세력을 넓히지 못한 채 고립돼 있었다. 이 같은 처지의 홍군을 구한 것이 바로 ‘시안사변’이었다. 이 점에서 장정의 진정한 끝은 시안사변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상당히 일리가 있는 얘기다.

■ 홍군을 살린 장쉐량

앞에서 살펴보았듯 1936년 10월, 홍군은 소련이 제공하는 군수물자를 보급받기 위해 황허(黃河)를 건너기 시작했다. 장제스는 국민당군의 저지작전을 지휘하기 위해 1936년 12월4일 시안으로 날아왔다. 12월12일 새벽, 장제스는 매일 하듯이 잠옷 차림으로 아침체조를 하고 있었다. 갑자기 총소리가 들렸다.

“웬 총소리야? 빨리 알아봐.” 보좌관에게 지시했다. 보좌관이 나가보자 경호실장이 총을 맞아 쓰러져 있었고 장쉐량의 부하들이 총을 쏘며 돌진해오고 있었다. 믿었던 장쉐량의 쿠테타였다. 장제스는 잠옷 바람으로 산으로 도주해 바위 뒤에 숨었다. 그러나 두 시간 뒤 장쉐량의 부하들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장쉐량은 후에 자신이 장제스로 하여금 공산당과 손을 잡게 함으로써 제2의 국공합작을 통해 항일투쟁에 나서도록 압박하려는 순수한 동기에서 장제스를 납치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그가 마오쩌둥(毛澤東)과 내통해 장제스를 제거하고 중국의 실권자가 되고 싶어했다고 주장한다.

진실이 무엇이든 그가 홍군을 살린 것은 사실이다. 저우언라이(周恩來)가 장쉐랑이 보낸 전용 보잉기를 타고 시안으로 날아왔다. 장쉐량, 저우언라이, 장제스 간의 협상이 진행됐다. 장제스는 결국 소련이 개입한 가운데 내전을 종식하고 항일투쟁을 벌이겠다는 내용을 핵심으로 한 장쉐량의 요구조건을 수락했다.

이 같은 제2차 국공합작에 의해 공산당은 합법적 정당이 됐고 국민당으로부터 무기와 예산을 정기적으로 지원 받을 수 있게 됐다. 즉 200만 명의 인구와 12만㎢의 영토를 할당 받았고 4만6,000명의 군대에 대한 무기와 급여를 지급 받았다. 대신 홍군은 국민당군의 제8로군으로 편입됐다.

■ 장제스 살린 스탈린

스탈린과 소련, 그리고 코민테른은 처음부터 국민당과 장제스에 대해 우호적이었다. 그래서 중국공산당에 대해 제1차 국공합작을 강요하며 국민당에 입당하라고 지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는 결국 장제스가 공산당을 대량학살하는 것으로 끝이 난다.

시안사변이 나자 마오는 모스코바에 장제스의 살해를 승인해주도록 요청했다. 그러나 스탈린과 코민테른은 장제스를 죽이는 것은 항일 통일전선을 심각하게 훼손할 뿐 아니라 일본의 중국침략을 도울 수 있는 친일행위라고 극력 반대했을 뿐 아니라 시안사변 자체를 공개적으로 비판하고 나섰다.

장제스의 난징(南京)정부 역시 장쉐량에게 선전포고를 하고 군대를 시안으로 이동하는 한편 장쉐량의 군대에 폭격을 가했다.

소련의 지지를 얻는데 실패한 장쉐량은 결국 장제스를 찾아가 무릎을 꿇고 울면서 자신의 행동이 사려 깊지 못했다면 잘못을 빌었다. 한편 스탈린은 장제스가 제2국공합작을 받아들여 공산당과 협력관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회유책을 썼다.

모스코바에 유학 갔다가 인질로 잡혀있던 장제스의 아들 장징궈(張經國)를 보내주겠다고 제의한 것이다. 소련의 개입으로 장제스-저우언라이-장쉐량의 협상이 순조롭게 진행되어 제2차 국공합작이 성사됐다.

그러나 장쉐량은 가지 말라는 저우언라이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장제스의 비행기를 타고 그를 따라 난징으로 갔다. 그 결과 이후 50년 이상 장제스의 인질로 연금상태에서 지내야 했다.

장제스는 내전에서 패배해 대만으로 도주할 때도 그를 데리고 갔다. 장제스가 죽은 뒤에야 연금에서 풀린 장쉐량은 하와이로 이민을 가 2001년 그곳에서 100살의 나이로 숨을 거뒀다. 장제스와 마오보다도 25년 더 오래 살아 남은 것이다.

이처럼 장제스의 2인자 장쉐량이 마오와 홍군을 살렸고, 거꾸로 스탈린이 극우반공주의자 장제스를 살렸으니 역사란 정말 묘한 것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사실 스탈린은 이후 1949년 내전당시에도 홍군이 장강을 넘어 남쪽으로 도주한 장제스군을 공격하는 것을 끝까지 반대했다. 즉 중국이 홍군?의해 통일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 시안사변의 흔적

시안에는 크게 3개의 사변 관련 유적이 있다. 우선 장제스의 숙소와 장제스가 도망갔다가 잡혀온 현장이다. 그리고 장쉐량의 공관이 있다.

시안 시내에 있는 장쉐량의 공관은 지난번 시안에 왔을 때도 못 봤던 곳이다. 이번에도 공사 중이라 닫혀 있었으나 사정을 얘기하고 마당까지 들어가 공관의 전경은 찍을 수 있었다.

장쉐량이 자신이 주장하듯 항일투쟁을 위한 순수한 동기에서 시안사변을 일으킨 것인지, 아니면 장제스를 제거하고 일인자가 되기 위한 정치적 동기에서 시안사변을 일으킨 것인지 모르지만, 역사는 엉뚱한 조연에 의해 발전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으로 시외를 벗어나 있는 시안사변의 현장을 찾았다. 문득 시안사변이 12.12 군사쿠데타와 같은 12월12일에 일어났다는 사실에 생각이 미쳤다. 12.12가 ‘시비시비’여서 시비를 거는 쿠데타와 관련이 있는 것인가? 그러나 같은 군사 쿠테타라도 중국의 12.12가 역사적으로 긍정적 의미를 갖는다면 우리의 12.12는 반역사적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전혀 다르다.

사변의 현장은 시안 최고의 관광지인 진시황릉의 병마총에서 가까운 화칭츠(華淸池)에 위치해 있다. 우선 장제스가 도망간 화칭츠 뒷산으로 올라가던 도중 장제스가 앉아있는 모습에 깜짝 놀랐다. 장제스의 사무실 모양을 꾸며놓고 장제스 옷을 빌려주어 사진을 찍고 돈을 받는 곳이었다. 중국의 상업주의라니!

더 올라가자 계곡의 돌 사이에 ‘장제스 은신처’라고 써 놓은 곳이 나타났다. 천하를 호령하던 독재자가 잠옷 바람으로 이곳에 쭈그리고 앉아 겨울 추위에 떨면서 두 시간을 있었을 생각을 하니 웃음이 나왔다. 그 때의 굴욕감이 아마도 그로 하여금 죽을 때까지도 장쉐량을 연금에서 풀어주지 않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같은 굴욕감이 농지개혁과 같이 중국 민중 절대다수가 바라는 개혁을 통해 민심을 얻으려는 와신상담으로 이어지지 못함으로써 결국 그는 대륙을 잃고 대만으로 쫓겨나고 만 것이다. 만일 장제스가 그 때의 굴욕감을 개혁의 와신상담으로 발전시켰다면 시안사변은 그에게 전화위복의 기회가 되었을 것이다. 그것이 장제스의 한계였다.

화칭츠 뒤뜰에 있는 우젠팅(五間廳)은 장제스가 홍군의 황허 도하를 저지하기 위한 작전회의를 주재하던 회의실과 집무실, 숙소, 그리고 경호원 숙소 등으로 구성돼 있다. 장쉐량이 자신들을 살려준 만큼 입구에는 하와이에서의 노년생활까지 장쉐량의 사진들을 다양하게 전시해 놓았다.

사무실 바깥 벽에는 당시 장쉐량의 군대와 장제스의 경호원들간에 벌어진 총격전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다. 벽의 총알구멍에 투명한 유리를 씌우고 ‘시안사변의 총탄자국’이라고 써 놓았다. 당시 장제스를 체포한 장쉐량의 특공대에는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에 온 한인도 끼여 있었다니 그 총탄이 한인 병사의 총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강대 정외과 교수

아침 지하철 훈남~알고보니[2585+무선인터넷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