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너 김재형(35)은 꽤 먼 길을 돌아왔다. 서울대 성악과를 졸업한 그는 1998년 뮌헨 ARD 콩쿠르에서 1위 없는 2위를 하면서 유럽 무대에 진출했고, 2002년에는 플라시도 도밍고 콩쿠르에서 특별상을 받았다. 당시 도밍고는 그를 “마치 마법을 부리는 것처럼 다양한 색깔을 내는 가수”라고 평했다.
콩쿠르를 계기로 세계 3대 오페라극장으로 꼽히는 영국 런던의 로열오페라하우스(코벤트가든) 데뷔 기회가 주어졌다. 하지만 그는 그 기회를 잡지 못했다. 당시 소속된 독일 카셀 극장의 공연 일정과 겹쳤기 때문이다. “감히 로열오페라의 공연을 거절했으니 미운 털이 박혔겠죠. 또 기회가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좀처럼 주어지지 않더군요.”
로열오페라하우스는 6년이 지난 2008년에야 다시 그를 불렀다. 베르디 오페라 <돈 카를로> 의 타이틀롤이었다. 요즘 오페라계에서 가장 잘 나가는 스타 테너 롤란도 비야손이 전회 출연하기로 했다가 일정상 2회가 불가능해지면서 그에게 기회가 왔다. 전석 매진에 티켓값이 180만원까지 치솟을 만큼 화제의 작품이었다. 돈>
6월 26일과 7월 3일 출연을 준비하던 김재형의 데뷔는 예정보다 앞선 6월 20일 갑작스럽게 이뤄졌다. 비야손이 알레르기 증상을 보여 공연을 몇 시간 남기고 김재형으로 교체된 것.
김재형이 카를로 왕자로 출연한다는 안내 방송이 나오자 관객석에서는 “우~”하는 야유가 나왔다. 하지만 2막 로드리고와의 2중창이 끝나자 5분간 박수가 이어지더니 “앙코르” 외침이 들렸다.
그리고 5시간 후에는 열광적인 기립박수가 쏟아졌다. “기립박수를 받은 건 생전 처음이었어요. 그냥 멍했습니다. 제대로 못했다면 음악 인생이 끝장날 수도 있는 무대였는데 갑자기 해서 오히려 부담없이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영국 언론들은 공연 후 “알프레드김(김재형)의 돈 카를로를 보고 비야손은 기분이 상했을 것이다”, “갑작스러운 캐스팅 변경은 문제였지만 알프레드김은 최고의 돈 카를로였다”며 호평했고, 로열오페라 뿐 아니라 뉴욕 메트로폴리탄오페라 등 다른 메이저 극장들의 출연 제안이 이어졌다.
이날 일이 소문이 난 덕에 같은 작품으로 프랑스 바스티유오페라에도 데뷔했다. 지난 11일 주역 테너에게 문제가 생기자 비야손의 대타를 훌륭히 해낸 김재형에게 구조 요청이 왔고, 공연 직전 파리에 도착한 그는 리허설도 없이 무대에 올라 성공적으로 공연을 마쳤다.
김재형은 “어떤 갑작스러운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똑같이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초연함은 힘든 시기를 견뎌내면서 얻은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일찍부터 두각을 나타냈기에 처음 유럽으로 떠날 때는 1, 2년 안에 메이저 극장에 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하지만 현실은 생각과 달랐고, 작은 무대와 주목받지 못하는 프로덕션을 전전하면서 슬럼프에 빠져 노래를 그만둬야 하나를 심각하게 고민하기도 했다.
“언더그라운드에서 올라왔기에 시간은 많이 걸렸지만 몇 십 배의 경험을 쌓았다”는 김재형은 “교통이 좋은 프랑크푸르트에 살기 때문에 유럽 어떤 곳에서 연락이 와도 바로 달려갈 수 있다”며 웃었다. 그리고 “이제는 누구의 대타가 아닌, 내 이름으로 온전하게 서서 인정받는 일이 남았다”고 덧붙였다.
눈에 띄게 환해진 얼굴로 한국을 찾은 그는 다음달 8일 인천종합문화예술회관에서 정명훈이 지휘하는 아시아필하모닉오케스트라아카데미의 <라보엠> 콘서트에서 로돌포 역할로 국내 관객을 만난다. 라보엠>
김지원 기자 eddi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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