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미국 캘리포니아에 연구교수로 나간 적이 있다. 일년 간 지내면서 충격적인 두 개의 사건을 목격했다. 하나는 캘리포니아주가 전기를 민영화한 뒤 전기회사들이 폭리를 취하기 위해 장난을 쳐 신호등이 꺼지는 등 정전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다른 하나는 대통령선거에서 알 고어 민주당 후보가 득표에서 조지 부시 공화당 후보를 누르고도 선거인단이라는 간선제 때문에 대선에서 패배한 것이다.
간선제의 부작용 큰 미국 대선
특히 승패를 가른 플로리다에서 가난한 흑인들이 사는 선거구의 경우 투ㆍ개표기가 엉망이라 무효표가 엄청나게 나와 부시 후보의 승리에 일조를 했다. 1997년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가 표를 더 받고도 간선제 때문에 대선에서 패배했다면, 게다가 호남의 경우 투ㆍ개표기가 영남과 달리 구식이라 무효표가 현저하게 나와 대선결과에 김대중 후보가 졌다면, 어찌됐을까? 우리 같으면 폭동이 났어도 열 번은 났을 2000년 대선 사태를 바라보면서 그동안 주로 긍정적인 면을 생각해 왔던 미국정치와 미국의 민주주의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됐다.
한국계로는 처음으로 미국 연방 하원의원을 지낸 김창준 전 의원이 한국일보에 연재중인 ‘김창준의 숨겨진 정치이야기’ 중 지역구와 비례대표제를 다룬 2008년 7월 9일자 글(‘비례대표제가 꼭 필요한가’)을 읽으면서 문득 떠오른 것이 바로 2000년의 경험이었다. 김 전 의원은 이 연재에서 미국정치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을 진솔하게 소개하고 있어 미국정치를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그리고 9일자 글에서 미국의 경우 비례대표라는 제도가 없어 지역구가 없는 의원이란 상상할 수도 없다며 한국의 경우도 돈으로 금배지를 사는 것으로 변질되어 있는 비례대표제가 꼭 필요한 제도인지 묻고 있다. 특히 김 전 의원은 미국 의원들이 지역구 관리에 얼마나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가를 상세하게 서술하며 지역구가 없는 한국의 비례대표 의원들은 지역구 관리도 할 필요가 없으니 매일 무엇을 하고 소일하는지 궁금하다고 비판적으로 논평했다.
물론 한국의 비례대표제가 김 전 의원이 비판했듯이 국회의원직을 돈으로 사는 ‘돈국구’가 되는 부작용을 심심치 않게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비례대표제에 대해 부정적인 김 전 의원의 생각은 미국정치를 이상적인 모델로 놓고 한국정치를 이에 맞추어서 판단하는 미국 중심적인 매우 잘못된 것이다. 다시 말해, 우물 안 개구리 아니 ‘미국 안 개구리’같은 생각이다.
사실 선거제도에 관한 한 선거인단제도라는 간선제에다가 다수득표자가 모든 것을 차지하는 소선거구제에 비례대표제조차 채택하지 않고 있는 미국은 ‘후진국 중의 후진국’이다. 민주주의국가 중 대통령제를 채택하면서 소선거구제를 취하고 비례대표제가 없는 나라는 미국 뿐이다.
그 결과 수많은 국민들의 표가 사표가 되고 있다. 극단적인 예를 들어, 김 전 의원이 속했던 공화당이 모든 선거구에서 49%를 얻고 민주당이 51%를 얻으면 전체 득표율이 민주당 51%, 공화당 49%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의석수는 민주당이 모든 의석을 차지하고 공화당은 한 석도 못 갖게 되는 것이 미국의 선거제도다. 다시 말해, 국민 중 49%의 표는 사표가 되고 마는 것이다.
비례대표제 오히려 확대해야
그러나 독일식으로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를 실시할 경우 의석수가 전체 득표율, 즉 민의에 일치하게 민주당 51%, 공화당 49%로 분포하게 된다. 따라서 독일식 제도가 비례대표제를 전혀 채택하고 있지 않은 미국보다 백 배 민주적인 선거제도이다. 또 국회의원들이 지역구 관리 대신 국가전체의 정책을 고민하는 데 시간을 쏟으면 된다.
우리에게 시급한 것은 비례대표제가 꼭 필요한 것인가 하는 의문이 아니라 오히려 비례대표제를 더욱 확대하는 것이다.
손호철 서강대 정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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