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5년 10월18일, 류판(六盤)산을 떠난 마오쩌둥(毛澤東)과 병사들이 마침내 싼시(陝西)성 우치(吳起)에 도착했다. 그러나 닝샤(寧夏)군벌의 기병대가 후미를 쫓고 있었다.
마오는 펑더화이(彭德懷)에게 이들이 더 이상 추격을 못하도록 손을 보라고 지시했다. 펑더화이는 이후 성리(勝利)산이란 이름을 갖게 되는 한 야산에 저격수들을 매복시켜 이들을 몰살시켰다. 이로써 국민당군은 결정타를 맞았고, 홍군 중앙군의 도주행군은 끝이 났다.
장정을 368일이라고 하는 것도 이를 기준으로 한 것이다. 그러나 남은 사람은 8,000명(4,000명이라는 설도 있다)도 채 되지 않았다. 출발당시의 10분의 1 이하로 줄어든 것이다. 게다가 원래 출발했던 이들은 3,000명 정도 밖에 남지 않았다. 살아남은 것 자체가 승리였다.
우치 가는 길은 쉽지 않았다. 황토고원의 길답게 먼지가 많이 났다. 돌고 돌아 도착하니 ‘우치, 중앙홍군 장정 승리 종착지’라는 대형 선전판이 맞았다. 드디어 2만5,000리 장정의 종착지에 도착한 것이다.
가슴이 뭉클했다. 시내에 들어가 장정 광장을 구경한 뒤 성리산을 물었더니 바로 뒷산이라고 했다. 작은 야산인데 이 곳 역시 공사 중이었다. 차를 내려 먼지가 풀풀 나는 길을 걸어 올라갔다. 인부들이 성리산전투 기념탑을 만들고 있었다.
공사 먼지를 뚫고 올라간 산꼭대기 잡목들 사이에 큰 나무가 한 그루 서 있었다. 마오가 밑에 앉아 전투장면을 지켜봤다는 나무다. 그곳에 서자 우치시내가 다 내려다 보였다. 이곳에서 마오는 홍군의 저격에 추격군이 연이어 쓰러지는 광경을 바라보며 그 동안 국민당군에게 쫓기며 쌓인 울분을 시원하게 해소했을 것이다.
마오는 펑더화이의 이름이 들어간 시를 써주었다. 마오가 장정 중 특정인 이름을 넣어 쓴 유일한 시라는 점에서도 그가 이 승리를 얼마나 감격해 했는지를 보여준다.
그러나 이로부터 30년 뒤 마오는 ‘문화대혁명’이라는 이름아래 평생 심복이었던 펑더화이를 처참하게 죽음으로 몰고 갔다. 해가 지는 우치를 내려다보면서 비정한 역사를 생각했다. 조용히 마오가 펑더화이에게 헌사한 ‘펑 대장군’이라는 시를 읊어보았다.
흔히 장정은 홍군이 우치에 도착함으로써 끝이 났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사실 홍군은 우치에 그리 오래 머물지 않았다. 얼마되지 않아 바오안(保安)으로 이동했다. 바오안은 이후 홍군이 옌안(延安)을 수도로 정해 이동하기까지 머문 임시수도가 됐다. 마오와 홍군지도부들이 머물던 기념유적으로 향했다.
이곳에는 1936년 7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마오, 저우언라이(周恩來), 보구(博古)가 머물던 토굴이 있었다. 36년 12월. 마오는 이 토굴 밖 마당에서 푸른 눈의 한 젊은이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중국의 붉은 별> 의 신화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중국의>
그 젊은이는 국민당군의 포위를 뚫고 홍군의 심장으로 숨어 들어온 미국의 진보적 저널리스트 애드거 스노였다. 그는 한달간 이곳에 머물며 마오와 인터뷰를 한 뒤 38년 그 이야기를 책으로 출간했다. 세계 3대 르뽀문학의 대작이라고 일컬어지는 이 책은 마오와 장정을 세계에 처음으로 알렸다.
■ 혁명 수도와 서부개발
장정, 그리고 혁명홍군의 도시 하면 생각나는 것이 바로 옌안이다. 장정이 끝난 뒤 1년 반 뒤인 37년 1월부터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내전이 본격화하는 47년까지 10년 동안 홍군의 수도였기 때문이다. 드디어 옌안에 도착했다. 옌안은 2년 전 들렀을 때와 달리 활기가 넘쳤다.
시안(西安)까지 고속도로가 완공이 됐고 사방에 고층 빌딩과 아파트들을 짓고 있었다. 우치, 즈단(志丹ㆍ바오안의 현 지명)에서도 목격한 것이지만 옌안에 들어서 가장 놀란 것은 건설 붐이었다.
서부개발과 석유 덕분인 듯 했다. 나중에 취재해 보니 옌안에는 1000억 위엔(14조원)을 투입돼 홍ㆍ황ㆍ녹ㆍ흑 4대 산업기지가 건설되고 있었다. 홍색기지는 혁명의 수도였다는 역사성을 이용한 홍색관광지 발전 계획이다. 실제로 지난해에만 사상최고 수준인 650만 명이 옌안을 방문해 35억 위엔을 썼다고 한다.
황색기지는 황토고원의 지질적 특징과 문화적 특징을 관광자원으로 활용한다는 것이고, 녹색기지는 세계최고의 질을 자랑하는 사과 등 이 지역 농업을 발전시키겠다는 것이다. 이밖에도 지역에서 생산되는 석유를 가공할 수 있는 중국 최고의 석유화학기지를 건설하겠다는 계획(흑색 기지)도 갖고 있다. 그러나 사방에 지어대는 건물들을 볼 때 과연 다 분양이 될 것인지부터 걱정이 됐다.
이 같은 계획의 일환으로 지어지는 ‘옌안혁명기념관’은 2년 전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공사 중이었다. 1950년에 지은 낡은 기념관을 현대적으로 탈바꿈시키려는 것인데 아직도 공사 중인 것을 보니 엄청나게 큰 기념관을 짓고 있음이 분명했다.
홍군지도부가 시기에 따라 여러 차례 본부를 옮겼기 때문에 비슷비슷한 토굴 등이 여럿 있다. 그 중 양자링(楊家嶺)으로 향했다. 홍군지도부가 1938년부터 47년까지 머물렀던 곳으로 마오 등의 토굴숙소와 함께 중앙대강당과 혁명정부 사무실이 있었던 곳이다. 특히 중앙대강당은 42년 건설돼 공산당 제7차 전국대표자대회가 열린 큰 건물이다.
강당 안에는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 스탈린의 옆얼굴을 겹치게 한 동그란 그림아래 ‘중국 공산당 제 7차 전국대표자 대회’라고 쓴 큰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연단 앞에서 여럿이 사진을 찍고 있었는데 ‘시안○○○ 유한공사’라고 쓴 작은 현수막을 들고 있는 것으로 보아 회사에서 온 이른바 홍색유람이었다. 바람도 쐬고 역사공부도 할 겸 단체로 많이들 온다고 했다.
밝은 회색 홍군복을 입고 열심히 사람들에게 설명하는 아가씨가 눈에 띄었다. 지난 번 왔을 때 만났던 그 아가씨였다. 기념촬영을 위해 관광객들에게 홍군복을 빌려주는 아가씨인데 싹싹하고 자기 일을 너무 열심히 하는데다가 웃는 모습이 가히 ‘살인미소’여서 기억에 오래 남았다. 언제 내가 옌안에 다시 와 또 만나리라고 생각이나 했겠는가. 너무도 반가웠다.
강당을 나와 뒤편 언덕으로 올라갔다. 지도부의 토굴을 보기 위해서였다. 2년 전에는 마오의 책상에 앉아 사진도 찍고 그랬는데 이번에는 사람들이 많아 그럴 틈이 없었다. 확실히 옌안의 홍색산업은 뜨고 있는 것 같아 보였다.
■ 바오타산에 올라
숙소를 잡은 뒤 석양을 구경하기 위해 바오타(宝塔)산에 올랐다. 바오타산에는 옌안의 상징이 된 바오타라는 탑이 자리 잡고 있다. 당나라 때인 8세기에 만들어졌고 송나라 때 중건된 유서 깊은 탑은 높이가 20층 빌딩 높이에 해당되는 44m터나 된다.
게다가 산 위에 세워져 있어 당시 허허벌판이던 1930~40년대의 옌안 어디에서 사진을 찍어도 반드시 사진 속에 들어가게 돼 있었다. 이 때문에 원래 세워진 목적과 상관없이 홍군 혁명수도의 상징물이 되었다.
다시 보아도 운치가 있는 우아한 탑이었다. 탑 사이로 지는 석양과 옌안시를 내려다보면서 장정을 다시 생각해 보았다. 굽이치는 강을 건너고, 설산을 넘고, 죽음의 초지를 건넜던 장정은 지금 70여년이 지나 차를 타고 돌아보았어도 정말 ‘피와 용기로 쓴 대서사시, 패배이자 승리였고 절망이자 희망이었던 대서사시’이었다.
그 길을 다시 밟아온 험난했던 여정도 이제 끝나 간다고 생각하니 문득 <장정> 이라는 시를 읊고 싶어졌다. 마오가 장정을 끝내며 썼고, 이후 장정과 관련해 자주 인용되는 구절이 들어있는 시다. 장정>
홍군은 고단한 원정길도 겁내지 않았네(红军不怕远征难)
깊은 강과 험난한 산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네(万水千山只等闲)
서강대 정외과 교수
아침 지하철 훈남~알고보니[2585+무선인터넷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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