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 시절, 노래는 나에게 기쁨이었다. ‘박치’라는 아들의 놀림을 부정할 수 없을 만큼 그때나 지금이나 노래에 소질이 없지만 편곡은 물론 노랫말까지 마음대로 바꾸어 부르며 감정을 마음껏 드러내면서 행복해 하곤 하였다. 기타를 치지는 못하였지만 기타 치는 친구 옆에 붙어서 흥얼거리는 일은 나에게 기쁨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노래가 싫어졌다. 노래반주기가 나오면서였던 것 같다. 노래반주기는 편곡을 못하게 하고 가사도 바꾸지 말도록 하여 흥을 앗아가 버렸다. 로봇이 된 느낌이 들어 노래가 싫어졌고 노래방 분위기도 왠지 적잖은 거부감을 주어 오래 전부터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면서 노래방에 가지 않고 있다.
부득이 가야만 했던 경우에 남들은 신나게 노래할 때 짜증만 냈는데 궁하면 통한다고 하였던가? 나만의 즐거움을 찾아낼 수 있게 되었다. 남들은 리듬과 박자에 취할 때 모니터에 뜨는 노랫말을 감상하면서 인생을 음미하는 나만의 즐거움을 알아낸 것이다. 모 중년가수의 <유행가> 라는 노래 가사 내용 그대로 유행가 가사는 우리가 사는 세상 이야기였고 유행가 가사에는 사랑과 이별과 눈물이 있었다. 유행가>
사랑과 이별과 그리움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우리 인간에게 중요한 테마였나 보다. 문학에서도 사랑의 기쁨과 슬픔, 이별의 아픔, 임에 대한 그리움을 주제로 한 작품이 가장 많다. 그렇기 때문에 문학작품을 설명하면서 가끔 유행가를 끌어들여 설명하고, 그때에는 부끄러움을 저만치 밀쳐두고 노래를 흥얼거리곤 한다.
이별을 테마로 한 작품을 감상할 때에 ‘만날 때 아름다운 사랑보다는 헤어질 때 아름다운 사랑이 되자’는 주현미의 <잠깐만> 이라는 노래나, ‘묻지 않았지/왜 나를 떠나느냐고/하지만 마음 너무 아팠네/이미 그대 돌아서 있는 걸/혼자 어쩔 수 없었지/미운 건 오히려 나였어’라는 임지훈의 노래 <회상> 의 한 소절을 불러주곤 한다. 음정 박자도 중요하지만 노랫말을 깊이 음미하는 것이 보다 더 중요하다는 억지 아닌 억지 논리를 펼치면서 말이다. 회상> 잠깐만>
실력 부족인지 감성 부족인지 국어선생이지만 시를 온전하게 감상하기가 쉽지 않다. 깊이 생각해야만 의미가 가슴에 다가오는 시가 적지 않다. 명색이 시를 가르친다는 나도 이러한데 아이들이야 오죽하겠는가? 그래서인지 요즘 아이들은 시를 감상하려는 시도조차 않는다.
무슨 의미냐고 물으면 잘 모르겠노라고, 배우지 않았노라고 대답하곤 그만이다. 쉽지 않다는 것을 알기에 마냥 나무랄 수만도 없다. 그런데 유행가 가사는 쉽다. 그러면서도 가슴에 와 닿는다. 씹으면 씹을수록 맛이 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내가 노래를 좋아하는 이유이다. 안타까운 것은 요즘 사람들은 쉬운 유행가 가사마저도 음미하려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즐거움이라는 것이 신나게 웃고 떠들어댈 때에만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혼자서 조용히 음미하고 생각하면서 새로운 진리를 깨달을 때에도 즐거움과 행복은 우리를 찾아와 미소 짓도록 도와준다. 노래를 부를 때 멜로디에 취하면서 가사의 깊은 의미까지 음미하다 보면 보다 큰 즐거움을 맛볼 수 있다.
요즘 들어 텔레비전 음악 프로그램을 즐겨 보는데 가사를 음미하느라 리듬을 타지 못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게 무슨 대수인가? 라디오를 청취할 때에도 가사를 음미하다 보면 리듬에만 취해 노래를 감상하였을 때 느끼지 못하였던 재미를 느낄 수 있다.
흥에 겨워 큰 소리로 춤추며 노래하는 것도 즐거움이겠지만 이것만으로 부족한 이유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노래에서의 참된 기쁨은 리듬과 노랫말에 함께 취할 때 찾아오는 것 아닐까?
권승호 전주영생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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