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필을 카네기 홀 무대에 세우려는 나의 노력은 계속 되었다. 여기서 솔직하게 말 해둘 것이 있다. 처음에는 조용필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니라 이미자, 또는 패티김을 카네기 홀에서 공연을 하도록 기획했다. 그리고 나서 그 공연이 성공을 하면 연속해서 ‘Korean Artists in Carnegie Hall’이라는 제목으로 시리즈 공연을 기획 했다. 생각만 해도 재미있을 것 같지 않은가?
그런데 모든 좋은 일에는 항상 장애물이 등장 하게 된다. 이 두 가수에게 그 무렵 이런저런 개인적 사정이 있어서 힘들 것 같아 조용필을 택하게 되었다. 그러고 보면 조용필은 노래도 잘 부르지만, 운도 따르는 것 같다.
‘돌아와요 부산항에’로 인기가 상승을 하고 있지만 아직 톱클래스 가 되지 않은 상태의 가수가 카네기 홀 무대에 선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어찌 보면 본인에게는 최고의 가수로 올라가는 아주 좋은 기회를 얻었다고 봐야한다.
문제는 카네기 홀이 그렇게 호락호락 않다는 점이다. 대관 심사에서 한번 탈락 했기 때문에 이번에는 철저히 준비를 해 가지고 다시 책임자를 찾아 갔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그 책임자가 아주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동양사람 하나가 열심이 뛰어 다니는 것이 딱해 보였나? 서류를 놓고 가서 며칠 기다리라고 했다. 한 일주일 정도 지났나, 카네기 홀 측에서 연락이 왔다. 대관 심사를 통과 했으니 계약을 하자는 것이다. 내가 무대에 서는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신이 나던지, 즉시 달려갔다.
흥분된 마음으로 계약서에 사인을 하려고 하니까, 매니저가 서두르지 말고 내용을 자세히 읽어보라고 했다. 계약 조건을 잘 보라는 것이다. 차근차근 들여다보면서 나는 “이거 골치 아프게 생겼구나”라고 생각했다. 조건이 아주 까다로웠다. 음향, 조명, 무대 관리 등등 모든 부대시설과 그에 따르는 인원은 모두 카네기 홀 측이 제공한다. “노래 레퍼토리는 사전에 제출 해야하고, 공연 도중에 노래 순서를 바꾸지 말아야 한다. 공연 시작 시간은 칼같이 지켜야 하고, 앙코르가 많아서 끝나는 시간이 길어지면 노조와의 협약에 따라 오버타임 노임을 추가로 내야한다. 노래를 녹음하거나 녹화 할 때에는 돈을 따로 더 내야한다.”
이건 정말이지 장난이 아니다. 그런데 여기까지는 지킬 수 있지만 그 다음 조건에는 입을 벌릴 수밖에 없다. 관객들이 블랙 타이, 즉 턱시도를 입고 오든지 아니면 최소한 정장을 하고 들어오도록 권장을 하라는 것이다. 카네기 홀의 전통인 모양이다. 우리나라의 예술의 전당이나 세종문화회관에 그런 조건을 내 세울 수가 있을까?
어쨌거나 그런 까다로운 조건에도 불구하고 나는 계약서에 덜컥 사인을 하고 말았다. 우리나라에서도 마찬가지지만 미국에서 사인을 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모든 책임을 내가 맡아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즉시 서울로 왔다. 조용필을 만나서 사인을 받았다. 그리고는 그가 전속으로 있던 지구레코드사의 임정수 회장을 만났다. 해리 벨라폰테처럼 실황 녹음 디스크를 내자고 제안을 했다. “조용필 카네기 홀에 서다”라는 타이틀로 레코드도 내고, 비디오도 발매 하자는 것인데 사업 판단이 빠른 임 회장은 즉시 오케이를 했다.
조용필에게 만반의 준비를 하라고 말해 놓고 나는 다시 뉴욕으로 갔다. 그리고 그의 누나와 매형을 만나서 공연 티켓을 얼마에 또 어떻게 판매 하는 것이 좋을지를 의논했다. 미주 한국일보에 기사와 광고를 내고, 뉴욕에 있는 한국 식당에서 매표를 하도록 했다. 홍보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뉴욕 한국일보가 많이 도와주었고 조용필의 누나와 매형이 앞장서서 뛰는 바람에 표 파는 것은 문제가 없었다.
문제는 생각지도 않았던 곳에서 터졌다. 녹화를 하거나 상업용으로 녹음을 하려면 다시 돈을 내라는 것이 카네기 홀 측 이야기다. 그 돈이 만만치 않았다. 이거 큰일 났다. 갈수록 태산이라더니. 나는 노조 위원장을 찾아 갔다. 아마추어식 녹음이 아니라 디스크용으로 녹음, 녹화를 해야 하는데, 한국시장이 미국처럼 큰 것이 아니니까 협조해 달라고 했지만 요지부동이다.
교포들이 낸 입장료 수입만 가지고는 조용필과 악단 멤버들의 왕복 비행기 표 값이나 체재비를 해결할 수 있을 정도인데 추가비용을 내라니까 주저앉을 수밖에 없지 않은가. 다시 노조를 찾아 갔다. 혼자서 왔다갔다하는 것이 안돼 보였는지 싱글 레코딩을 하라는 것이다. 멀티 채널로 하지 말고 단순 녹음을 하라는 이야기인데 그렇게 하면 디스크를 내는데 문제가 될 수 있기 때문에 고민이 되었다. 더구나 녹화를 하려면 카메라를 한대만 쓰라는 것이다. 또 사정사정해서 카메라 두 대 쓰는 것으로 결정했다.
이젠 문제가 없으려니 했는데 또다시 문제가 생겼다. 조명 플랜을 만드는데 기본 조명을 벗어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려면 추가비용을 내라는 것인데, 말인즉 그 사람들이 요구하는 것이 무리는 아니라고 생각이 들지만 매우 야속했다.
이런저런 어려움을 조용필에게 얘기 해봐야 노래 부르는데 지장만 생길 것이어서 나 혼자 끙끙 앓기로 했다. 공연 날은 다가왔다. 뉴욕, 뉴저지는 물론이고 인근 필라델피아, 워싱턴DC, 보스턴 등지에서도 공연을 보러 왔다. 지금 내가 기억하기로는 관객들 가운데 점퍼나 티셔츠 차림으로 온 사람은 없었던 것 같다. 공연 시작 전에 계속해서 들어오는 관객들을 보니 기분이 아주 좋았다. 그런데 여기서 또 문제가 생겼다.
아침 지하철 훈남~알고보니[2585+무선인터넷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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