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문화> 의 기치를 들고 나온 20대의 소설가 <최인호> . 그의 등장은 불황의 늪에 빠져 있던 한국영화계에 큰 돌파구가 되었다. 그 것은 뜻밖에 영화 제작 경험이 전혀 없던 한 젊은 영화 마니아 손에 의해 시작되었다. 1973년, 영화법이 개정되면서 몇 개의 영화 제작사가 추가로 인가된다. 그 중 하나가 <화천공사> 다. 이 회사가 주옥같은 작품들을 제작하여 70년대 한국영화계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킨다. 박종찬 사장은 영화 마니아였다. 부호의 아들인데다 경기고, 연세대 상대 출신이었으니 당시 충무로 영화계로서는 매우 낯선 존재였다. 박 사장이 퇴근하면 직행하는 곳은 용산 미8군 영화관이었다. 영화 수입업이 직업이라 그랬다 해도 그는 아주 별났다. 영화관에서 보는 것으로 양에 안 차면 필름을 몰래 빼내 집에서 볼 정도였다. 그는 국내외 영화시장에 대해 폭 넓은 이해를 갖고 있었을 뿐 아니라 매우 특수한 소재를 찾아내는 재능이 탁월했다. 화천공사> 최인호> 청년문화>
당시 한국 영화는 거의 지방 토착자본에 의해 제작되었다. 가장 큰 폐해는 ‘모험’이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박 사장은 과감하게 이런 제작 방식을 배제하고 자사 자본으로 승부를 걸었다. 그는 기획, 감독, 시나리오가 영화의 핵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창립 작품을 하길종 감독에게 맡겼다. 하 감독은 변함없이 반체제 영화를 들고 나왔다. 한사군(漢四郡) 시대에 관이 한 가정의 행복을 처절하게 유린하는 내용의 <수절> 이 그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당장 중앙정보부가 제동을 걸었다. 그는 과감하게 모든 책임을 지겠다며 제작을 착수하였다. 수절>
형과 나는 2년 만에 다시 촬영현장에서 만났다. 전라북도 무주 구천동. 겹겹이 누빈 무사복 차림으로 마상 결투하는 장면, 미친 듯이 날뛰는 말발굽 사이로 보이는 마구간에서의 정사장면, 감독의 카메라워크와 연기지도는 배우들과 스탭들이 한 순간도 더위를 느낄 틈을 주지 않았다. 말을 타고 달리며 칼 싸움을 하다 계곡 아래로 떨어지는 장면이었다. 감독은 한 컷으로 촬영할 것을 요구하였다. 나는 위험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상대 무사역할은 오지명 씨였다. 그가 계곡을 향해 말을 빠르게 몰았다. 나도 칼을 뽑아 들었다. ‘쨍 쨍’ 두 번의 결투가 끝나고 말이 놀라서 두발을 세우는 사이에 화살이 내 등 뒤에 날아와 내가 계곡 밑으로 굴러 떨어졌다. 잠시 후 ‘컷’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나는 ‘오케이’ 냐고 물으며 일어났다. 그러나 순간 그대로 주저앉았다. 오른쪽 다리에 강렬한 통증이 느껴졌다. 다리가 부러진 것이었다. 촬영은 중단되었다.
다리를 깁스한 채 모처럼 쉴 기회가 생겼다. 조선일보에 연재되던 ‘별들의 고향’이 출판되었다는 광고가 실렸다. 연재될 때 재미있게 읽은 기억이 나서 구해다가 읽었다. 꽤 재미있었다. 상중하 3권을 한 잠도 못자고 단숨에 읽어버렸다. 곁에서 간호하던 아내도 재미에 빠져 약 주는 시간마저 잊고 있었다. 그녀가 책을 다 읽자마자 나는 ‘기똥차지? 이 거, 제작하자! 다시 일어나는 거야!’라며 지팡이를 짚었다. 빨리 퇴원해 판권을 구입하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아내가 막아 섰다. “내가 알아볼게.” 그녀는 책을 들고 급히 나갔다. 며칠 후, 그녀가 기쁜 소식이라며 화천공사가 <별들의 고향> 영화 판권을 샀다고 알려주었다.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별들의>
돈을 구하러 간 그녀는 책을 들고 그녀의 오빠에게 달려갔던 것이다. ‘책이 너무 좋다. 내 남편이 제작을 하겠다는데 <화분> 제작의 후유증으로 여건이 불가능하다. 이건, 대박이다.’ 박종찬 사장은 책을 읽은 후, 즉시 원작자를 찾았다. 그리고 최인호 작가의 모든 제안을 받아들여 영화화를 결정하였다. 화분>
그녀는 나를 위로하였다. “오빠를 제작자로 성공시키자.” 그녀의 생각은 현명했다. 박 사장은 최인호 작가가 고교 동창인 이장호 씨에게 감독 데뷔작으로 자기 작품을 주기로 했다는 약속을 그대로 수용하였다. 그리고 주인공 ‘경아’ 역에 과감하게 아역배우 출신인 ‘안인숙’을 기용하였다. 모두가 모험이라고 발을 동동 굴렀다. 신인 감독에 아역티를 채 벗지도 못한 어린 여배우가 파란 많은 인생을 겪는 ‘경아’ 역을 과연 소화 할 수 있을까…. 음악 역시, 신인 강근식과 이장희를 과감히 기용하였다. 반면, 촬영감독은 최고의 베테랑 장석준에게 맡겼고 신인 여배우를 둘러싼 남배우는 최고의 스타 신성일과 윤일봉을 기용하는 안전장치를 잊지 않았다.
마침내 <별들의 고향> 은 1974년, ‘국도극장 단관 47만’이라는 한국영화흥행 기록을 새로 쓰는 사건을 일으키고 만다. 이장희의 영화주제곡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 ‘한잔의 추억’ 등도 대 히트를 하였다. 별들의>
새로움을 향한 과감한 도전. 이 한편의 영화가 충무로 영화계에 새로운 청년문화의 바람을 일으키기 시작한 痼甄? 이어 최인호와 하길종의 합작품 <바보들의 행진> 이 만들어졌다. 바보들의>
박종찬 사장의 사무실은 한국 청년문화인의 아지트였다. 송창식, 윤형주, 김도향, 조영남, 개그맨 전유성 등등 각 분야의 젊은 문화인들이 들끓었다. 소설가 김승옥 씨도 이 대열에 합류해 1977년 조해일의 소설 <겨울여자> 시나리오 작업을 맡았다. 그리고 신예 김호선 감독과 신인 장미희를 기용하여 ‘단성사 단관 133일간 60만’ 관객이라는 대기록을 세워 자사가 세운 <별들의 고향> 흥행기록을 3년 만에 다시 갈아치웠다. 별들의> 겨울여자>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박종찬 사장은 액션 감독의 대명사였던 임권택 감독의 인생을 뒤바꿔 놓는다. 1970년 중반까지 액션 영화를 주로 감독하던 임권택에게 <만다라> <족보> <길소뜸> <안개마을> 등을 감독하게 하여 임권택 작품 세계의 지평을 열어주었다. 나의 대표작인 <땡볕> 또한 그의 제작 작품이다. 땡볕> 안개마을> 길소뜸> 족보> 만다라>
결국 2000년대 한국 영화계의 중흥을 일으킨 수많은 영화 인재들이 그로부터 배출되었다. 그는 사실 신비한 인물이다. 100여 편의 영화를 제작하며 시대정신의 최전선에 있었지만 정작 그를 만나 본 사람은 많지 않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고 해도 그의 존재감은 뚜렷하다. 그는 오늘도 서울 강남 한복판에 우뚝 세워진 ‘씨네시티’ 멀티플렉스에서 하루에도 몇 편씩의 영화를 보며 젊은 영화인들과 새로운 영화기획에 몰두하고 있다. 2006년 제10회 부천국제영화제는 그에게 ‘아름다운 영화제작자 상’을 수여하였다. 그는 실로 아름다운 영화 제작자다. 그 외에 수많은 아름다운 영화인들이 있기에 우리는 즐겁다. 그리고 꿈을 꾼다. 아름다운 한국 영화에 대한 멈춰서는 안 될 꿈을….
아침 지하철 훈남~알고보니[2585+무선인터넷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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