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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여성시대와 함께하는 우리 이웃 이야기] 보고 있어도 보고 싶은 존재였던 큰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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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여성시대와 함께하는 우리 이웃 이야기] 보고 있어도 보고 싶은 존재였던 큰딸

입력
2008.07.17 0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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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점 더 멀어져 가네~…’뭐 이런 노래가사가 있지요. 요즘 내 딸과 저의 관계가 이런 것 같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조금씩 아주 조금씩 실망하고 섭섭해 집니다.

처음 딸아이를 낳아 기고 걸으며 “아빠, 아빠” 혀 짧은 소리로 부르고, 퇴근하고 오면 안아 달라고 거실 끝에서부터 뛰어오고, 내 먹던 숟가락으로 함께 먹어도 거리낌이 없었을 때 그때는 정말이지 “아! 이놈 나중에 시집을 어떻게 보내지. 아까워서 다른 놈 어떻게 주지”하는 생각이 들곤 했습니다. 정말 ‘보고 있어도, 보고 싶은’ 그런 존재 였지요.

딸은 이제 12살입니다. 아이는 돌이 지나고 얼마 안 됐을 때부터 정말 똑똑했습니다. 조그마한 입으로 조잘조잘 말하는 것을 보면 밥 안 먹어도 배가 불렀습니다. 서너살 무렵에는 할아버지댁에 가서 엄마 아빠 싸운 이야기까지 다 하는 바람에 겉으론 야단쳤지만 너무 귀여웠습니다. 가르쳐 주지도 않았는데 TV 자막을 읽는 걸 보고 ‘영재교육을 시켜야 하나?’하는 고민도 했구요.

이러던 녀석이 처음으로 실망시킨 것은 7살 때였습니다. 딸 아이 친구 엄마가 요즘 우리 딸 돈 쓰는 게 이상하다고 귀띔을 하더군요. 며칠 뒤 아내가 피아노 선생님에게서 전화 한 통을 받았습니다. 레슨비가 이번 달에 납부 되지 않았다고. 아이를 다그쳐 물으니, 학원에서 나쁜 오빠들이 뺐어 갔다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아내는 오히려 학원 선생님에게 큰소리로 따졌는데, 학원 선생님이 아이에게 다시 찬찬히 물으니 본인이 그 돈을 다 썼다더군요.

당시 7만원이나 되는 돈을 겨우 7살짜리가….’우리 부부는 며칠 동안 야단 칠 기력도 없을 만큼 실망했습니다. 아내는 출근 버스에서 울기까지 했다고 하더군요. 아무튼 며칠에 걸쳐서 아이를 야단치고 어르고 달랬습니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나도 내 자식에게 실망할 수 있고, 내가 학교 다닐 때 문제집 산다고 거짓말 하고 엄마에게 돈을 타냈던 것처럼 나도 당할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습니다.

실망이 컸지만 자식 일이라 며칠 지나지 않아서 잊었습니다. 이후로 착하게 커 주는 딸이 고마웠고 아이 구구단 외우는 소리가 유명한 가수가 부르는 노래보다 더 즐거웠습니다. 공부도 곧잘 해서 시험지에 동그라미 개수가 적금통장에 돈 늘어나는 것보다 더 좋았습니다. 아내가 “오늘 몇 시에 들어와요?”하는 말은 잔소리로 들려도, 딸아이가 “아빠 오늘 몇 시에 들어와요?”하는 말은 다르게 들렸습니다. 대답하는 내 목소리 톤도 분명 달랐을 겁니다. 동네슈퍼에서 과자 몇 개를 골라서 집으로 가는 동안 ‘이 녀석 좋아하면서 받아 들겠지’하는 마음에 퇴근길은 늘 행복했구요.

그런데 인정하기 싫지만 이 녀석 요즘 사춘기 같습니다. 나를 점점 멀리 합니다. 퇴근길에 과자를 사 갖고 가면 제 동생은 “와”하고 달려드는데, 이 녀석은 “나 이과자 싫어하는 데, 아빠 다음부턴 다른 걸로 사다 주세요”라고 새침하게 말을 하며 과자를 내려 놓습니다. 그 말 듣고 어른인 나도 삐치게 됩니다. 며칠 전 퇴근하니 아이와 엄마가 목소리를 높여 싸우고 있더군요. 누구 편도 들 수가 없어서 가만히 듣고 있으니 아이가 학원을 결석한 모양이더군요. 다소 놀라긴 했지만 한편으론 ‘녀석 그럴 나이가 되었지’ 싶더군요.

그래도 야단을 쳤더니 이 녀석 풀이 팍 죽더군요. 저녁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말 한마디 없이 TV를 보는 모습에 마음이 좋지않아 “얼른 샤워하고 자라”며 엉덩이를 한 대 툭 쳤습니다. 애정표현을 한 거지요. 뭐 시집갈 만큼 큰 딸도 아니고, 초등학생 딸의 엉덩이 한 대쯤 툭 때릴 수도 있는 거 아닙니까? 그랬더니 이 녀석 고개를 홱 돌리면서 “아빠, 말로 하세요!”하고 눈을 흘기는 겁니다. 나는 또 소심하게 삐치고 말았습니다.

바로 다음날 아이는 학교에서 글짓기 상장을 받아 왔더군요. 난 또 건망증 환자가 되어서 ‘그래, 그럼 그렇지”하는 마음이 또 살짝 일어나고 다시 짝사랑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어제 낮 아내가 흥분한 목소리로 전화를 했었습니다. 아이 표정이 심상치 않아서 학교에 전화 했더니 이미 기말고사 성적이 나와서 부모님 사인을 받아오라고 했다더군요. 이 녀석 분명 전날 저녁 식탁에서 “성적이 안 나왔다”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럼 이 녀석 사인 조작까지?’ 그렇지 않아도 더운 날씨에 확 더 더워지면서 짜증이 밀려오더군요.

이렇게 아주 조금씩 조금씩 실망하면서 처음에 ‘내 아이는 대통령감일거야’에서 ‘아니 장관도 괜찮지. 그래, 제대로 된 직장만 잡아도 괜찮지’하는 식으로 부모의 꿈 크기를 낮춰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어제 밤에 딸과 많은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잔소리 꾼 아내를 놓아두고 2시간 이상 얘기했는데 울면서 다시는 안 그러겠다고 하더군요. 물론 이것도 거짓말이라는 거 압니다. 이미 수도 없이 속았고, 아마도 앞으로도 수 없이 또 속겠지요. 내가 내 부모에게 했듯이.

늘 공부 잘 하던 딸이 성적이 떨어지면 내 어깨의 힘도 함께 빠지는 게 사실이지만, 난 그런 것에 상관없이 내 딸이라는 존재 그 자체 만으로도 사랑한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내가 부모님께 거짓말하고 눈을 피해 요리조리 빠져나가던 일들이 나중에는 후회가 많이 되더라는 것도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내가 겪었던 수많은 시행착오들을 우리 딸은 제발 다 치르지 않고 자랐으면 하는 마음만은 꼭 알아 주길 바랬습니다.

이 녀석 얼마나 아빠 마음을 헤아렸는지 알 수는 없지만 나는 딸 아이를 다시 믿어 보기로 했습니다. 아마 조만간 난 또 딸에 대한 내 꿈의 크기를 조금씩 더 낮춰가겠지요. 내 부모님이 그랬던 것처럼. 그래, 진심으로 바란다. 그저 튼튼하게만 자라다오.

부산시 사상구 괘법동 오창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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