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변했다. 육두문자를 뱉으며 기자들을 죄고 눙치던 이준익(49) 감독 맞나 싶다. 국가주의(statism), 마르크스, 에밀 쿠스트리차 등의 낱말을 섞어 늘어놓는 말투가 진지하다 못해 현학적이다.
추켜세우면 되레 B급 감수성의 위악을 뒤집어 쓰던 능청과 거리가 있다. 생애 최대의 제작비(70억원)를 들인 <님은 먼곳에> 를 찍어 놓고 그는 하고픈 말이 좀 있는 듯했다. 님은>
인문학적 사유의 깊이를 보여주며 띄엄띄엄 말을 잇는 태가 흡사 교양 수업 맡은 시간강사 같다. 그 ‘강의’를 듣는 재미에, 인터뷰가 군데군데 동문서답으로 흐르는 것도 내버려뒀다. 감독의 목소리를 그대로 전한다.
바꿨어. (욕쟁이 할머니 말투가) 진부하다고 구박을 해대서… 이제 독설 인터뷰 안 할 거야. 사실은 다음 영화 찍고 다시 맘대로 얘기하려고, 오늘부터 운기조식(運氣調息)하는 거야.(웃음)
■ 이준익의 직설화법
내게도 남자가 갖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강박이 있나 봐. 사실 <황산벌> , <왕의 남자> , <라디오스타> , <즐거운 인생> 도 단순한 오락물이 아닌, 이데올로기의 소산으로 봐야지. 사회의 단면을 도려내는 무의식적인 의지가 있었다고 할까. 근데 영화 몇 편 찍어 놓고 그런 얘기를 하는 게 쑥스러웠지. 그런데 이번엔 영화를 만들어 놓고 한 번 외치고 싶었어. 감독으로서, 또 개인으로서 일종의 배설일 수 있지. 즐거운> 라디오스타> 왕의> 황산벌>
전작들에는 남성성을 정당화하는 일종의 비겁함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그 비겁함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는 의지가 작용한 것 같아. 여성의 눈으로 ‘20세기 남성’의 존재를 바라봐서 그런 게 아닐까. 새로운 세계관을 새로운 시각(순이)으로 담아냈다는 희열 때문인지, 자꾸 영화에 대해 무언가 말을 하고픈 욕망이 생겨. 근데 과도한 주장이나 선언으로 받아들여질까봐 걱정도 돼. 이제 자제하려고.
■ 눅진한 세월, 해원(解寃)의 영화
사실 <왕의 남자> 가 더 무거운 소재지. 봉건사회에서 천민이 왕에게 1대 1로 맞선다는 것 자체가 극단적 도발 아니겠어? 근데 수백년 전의 이야기고, 관객에게 어떤 영향도 미칠 수 없는 사건이기에 가볍게 즐길 수 있었지. 왕의>
근데 <님은 먼곳에> 는 아직 그 영향이 현존하는, 20세기의 이야기라 무겁게 느껴졌을 거야. 21세기에도 냉전의 불편함과 증오는 배설되지 않고 남아 있어. 살아 있는 자들의 관계 속에 내재된 그 응어리 때문에 이 영화가 무겁게 느껴지는 거겠지. 님은>
이렇게 설명하면 어떨까. 내 영화는 업(業)을 풀기 위한 과정이야. 20세기의 대한민국은 끊임없이 증오와 상처를 생성해왔지. 그건 냉전 때문일 수도, 독재 때문일 수도 있지. 나는 이성적인 논리로 그걸 설명하려고 영화를 하는 게 아냐. 내 부모 세대로부터 내 자식 세대까지 면면이 이어지는 증오와 상처를, 나는 영화라는 도구를 통해 풀어 내는 거야. 그래서 내 영화를 보고 살풀이 같다고 느끼는 사람이 있는 거겠지.
■ "니는 사랑이 뭔지 아나?"
자기를 소 닭 보듯 하는 남편을 전쟁터까지 찾아가는 여자의 심정? 그건 관객이 해석할 몫으로 남겨 놔야지. 그걸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정말 신파가 되는 거고….
이렇게 한 번 생각해 보자고. 상길과 순이의 관계도, 어쩌면 이 시대의 환경이 만들어 낸 상징화된 관계가 아닐까. 해소되지 않은 증오감을, 맞서지 않고 피함으로써 봉합해 온 관계. 순이는 그 관계를 회복하고자 손을 내밀지. 근데 곱게 내밀면 슬그머니 피할 것 같애. 그래서, 강하게 내미느니 아예 따귀를 때리는 거지.
(6ㆍ25 전쟁과 친일파 청산과 군사독재와 IMF체제와 냉전 잔재에 대한 이 감독의 인식론적 고찰이 이어졌다.)
해결치 않고 어영부영 비켜서는 것은 모든 관계를 더 불편하게 만들 뿐이야. 해소하는 방법은 솔직해지는 것 뿐이야. 솔직한 걸 말로 하냐고. (따귀는)그것을 자길 떠난 남편에 대한 몸짓으로 상징화한 것으로 해석해 볼 수 있겠지. 순이는 정면으로, 몸으로 보여주잖아. 너 사랑이 뭔지 아니? 짝, 한 대. 사랑을 말로 하냐? 짝, 두 대. 사랑은 몸으로 보여주는 거야! 짝, 세 대.
■ 못다한 이야기를 위하여
그래, 요즘 스타일에 치중한 영화들이 많지. 그런데 내겐 아직 할 ‘이야기’가 있어. 200년 전에 서양이 만들어 놓은 이데올로기의 짐을 아직 우리나라가 지고 있잖아.
모두가 피해온 그 이야기를, 나는 하나씩 풀어 놓는 거야. 그런 시도가 퇴행적인 것으로 읽히는 것이 억울해. 나는 스타일에 집중하는 마에스트로(장인)보다는 사유의 스케일을 추구하는 아티스트가 되고 싶어.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들처럼 개인사가 가족사로, 다시 가족사가 사회사로, 사회사가 국가사로, 국가사가 인류사로 확장되는 ‘이야기’를 계속할거야.
영화? 난 돈 벌려고 영화 해. 근데 앞으로 돈이 될 게 뭐가 있겠어? 결국 문화고 역사야. 역사라는 콘텐츠를 돈으로 바꿀 수 있는 매체가 영화잖아. 맞아, 난 워커홀릭이야.
정신이 거세된 남자의 증오를 아나? 내가 중2때까지 할아버지와 한 방을 썼는데 할아버지는 평생 한학을 하셨어. 그런데 하루아침에 과거제도가 없어지는 바람에 할아버지는 평생 응어리를 안고 사셨지. 그 증오가 내게 세습된 것 같아. 그게 일에 대한 조급함으로 나타나는 거겠지. 모호하다고? 앞으로 증명해 줄게. 일로써 말이야.
■ 리뷰/ '님은 먼곳에'
1971년 경상도의 어느 농촌마을. 순이(수애)는 서울에서 대학 다니던 남편 상길(엄태웅)을 군대에 보내고 시어머니와 농사를 짓고 산다. 한 달에 한 차례, 5대 독자의 대를 잇기 위해 남편의 부대로 면회를 간다. 하지만 남편은 순이의 몸에 손을 대지 않는다. 서울에 두고 온 애인의 편지가 아내의 면회보다 반가운 상길이다.
서울 애인이 상길에게 이별을 고한다. 상길은 부대에서 사고를 치고 만다. 중대장은 선택의 여지가 없는 선택지를 내민다. "영창 갈래? 월남 갈래?" 순이는 남편이 월남에 갔다는 사실을 다음달 남편이 떠난 부대로 면회를 가서야 알게 된다. 시어머니의 악다구니는 애먼 순이에게 향하고, 순이는 월남으로 남편을 찾아 떠난다.
순박한 시골 아낙 순이는 월남 위문공연단의 '써니'가 된다. 반라의 몸으로 김추자의 노래를 부르는 순이에게 누군가 묻는다. "남편은 왜 찾으려고 하는데요?" 순이의 표정에 어지러운 무늬가 겹쳐진다. 사랑인지 오기인지 아니면 애처로운 생을 향한 순례인지, 순이는 사선을 향해 한걸음씩 다가선다.
덥고 습한 날씨가 불안하게 느껴지게끔, 영화는 시종 눅눅한 점도를 유지한다. 이준익 영화 특유의 유머러스한 상승 기운이 이번 영화에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건 미덕일 수도 있고, 흥행의 장벽일 수도 있다. 낭창낭창 늘어지던 엔딩도 이번 작품에서는 절도 있게 압축됐다. 묵직하게 감성을 짓누르는 느낌이 장마철 구름빛을 닮았다. 그 눅눅한 스크린 속으로, 김추자의 노래가 장대비처럼 쏟아진다. 수애라는 배우의 깊이를 발견하는 것은 또 하나의 즐거움. 24일 개봉. 15세 관람가.
신상순 기자 ssshin@hk.co.kr유상호기자 sh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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