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켤레’는 신이나 양말, 버선, 장갑 따위의 두 짝을 한 벌로 해서 세는 단위다. 그 헤아리는 대상들이 대체로 발에 신는 것이어서 한자어로는 ‘족(足)’이라고도 한다.
‘운동화 세 켤레’나 ‘버선 서너 족’에서처럼. ‘켤레’의 어원은, 확실하진 않으나, 동사 ‘가르다(分切)’로 거슬러 오르리라 어림짐작된다.
‘켤레’는 또 두 개의 점이나 선, 또는 수가 특수한 관계를 지녀 서로 바꿔놓아도 그 성질에 변화가 없을 때, 그 둘의 관계를 가리키기도 한다. 첫 번째 뜻이 번진 것이다.
켤레각, 켤레면, 켤레초점, 켤렛점, 켤레지름, 켤레축, 켤레쌍곡선, 켤레운동, 켤레복소수, 켤레행렬, 켤레근, 켤레광선 같은 말에 이런 뜻의 켤레가 보인다.
이런 뜻의 ‘켤레’ 자리에는 본디 한자어 ‘공액(共軛)’이 놓였다. 그러니까, 한 쌍의 신을것을 세는 단위 노릇만 하던 ‘켤레’의 뜻이 수학이나 물리학의 마당에까지 발을 내딛은 것은, ‘공액’이라는 말을 너무 어렵다 여긴 사람들이 벌인 말다듬기 운동의 결과다.
켤레를 단위로 세는 물건들은 그 한 짝만으로는 별 소용이 없는 경우가 많다. 군화 한 짝이나 고무신 한 짝은, 다른 짝 없이는, 쓸모가 크지 않다. ‘켤레’로 세지 않더라도, 두 짝을 한 벌로 삼는 물건들은 제 짝이 있어야 제 구실을 하는 경우가 많다. 젓가락도 그렇고, 나사도 그렇다. 사람도 그런 경우에 속할까?
보통명사 ‘사람’을 헤아리는 데 쓰는 단위는 의존명사 ‘사람’이다. ‘열 사람, 스무 사람, 백 사람’에서처럼. 그러니까 사람은, 장갑이나 젓가락과 달리, 쌍으로 세지 않고 홑으로 세는 것이 일반적이다.
사실, ‘사람’만이 아니라 대개의 보통명사가 그렇다. 그러나 ‘한 쌍의 연인’이라거나 ‘세 커플 예약’이라는 말도 드물지 않게 들을 수 있다. 그러니까 사람은 홑으로 세기도 하고 쌍으로 세기도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연애나 결혼을 통해 제 짝과 사는 걸 보면 사람도 ‘켤레족(族)’에 속하는지 모른다. 초등학교 교실에도 (단)짝이 있고, 순찰하는 경찰관에게도 짝이 있다. 하긴 사람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생물이 짝짓기를 통해서 번식한다. 그러니까 대부분의 생물은 ‘켤레족’이다.
'한 짝' 둘이 모여 온전한 상태를 이뤄
우리가 어떤 사물을 ‘한 짝’이라 부를 땐, 대체로, 그 사물이 마땅히 지녀야 할 짝을 지니지 못했다는 뜻을 내비친다. 그러니까 일종의 불완전성이랄까 불구성(不具性)이랄까 하는 결핍 상태를 드러낸다.
한 짝에(게)는 반드시 또 다른 짝(들)이 필요하다. 한 짝은 다른 무엇과 맺어지기 위한 존재, 맺어져야만 제 구실을 하는 존재다. 그 한 짝은 또 다른 짝(들)과 더불어 온전한 존재상태인 켤레(나 벌)를 이룬다. 그러니까 명사 ‘짝’은, 그 외양은 버젓한 완전명사지만, 속살은 불완전명사다.
이 명사 ‘짝’이 접두사로 쓰이면, 대개 ‘짝짝이’라는 뜻을 지닌다. 짝눈, 짝귀, 짝버선, 짝신 따위에 이런 뜻의 접두사 ‘짝-’이 보인다. ‘짝’신은 ‘짝’이 맞지 않는 신발이다. 이 두 ‘짝’은 아마도 한 어원에서 나온 다의어일 텐데, 그 의미가 서로 맞버티는 것이 흥미롭다.
짝버선은 버선 한 짝이 다른 짝의 제 짝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래서 온전한 켤레를 이루지 못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짝가시버시’(‘가시버시’는 ‘부부’라는 뜻이다)라는 말도 만들 수 있을까? 혼인하고 살다 보니, 상대편이 제 짝이 아니라는 걸 서로 깨닫게 된 부부의 뜻으로 말이다.
그러나 생물체의 짝은 사물이나 신체부위의 짝과는 다르다. 사물이나 신체부위에서 짝은 대칭성이나 동일성이나 보완성을 엄격히 요구하지만, 사람을 포함한 생물체는 그렇지 않다. ‘짝눈’을 한자어로 자웅목(雌雄目)이라 일컫는 걸 보면, 생물체의 암수는 외려 짝짝이여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짝사랑엔 '미완' '외통' 두가지 의미가
‘짝’이 접두사(와 비슷한) 구실을 할 때, 반드시 ‘짝짝이’의 뜻을 지니는 것은 아니다. 크기가 같고 방향이 반대인 두 평행력(平行力)이 한 물체에 작용할 때 이를 짝힘이라 하는데, 이때의 ‘짝’은, ‘짝패’에서처럼, 명사일 때의 뜻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엄밀히 말하자면, ‘짝힘’은 ‘힘’이라는 명사 앞에 ‘짝’이라는 접두사를 얹은 파생어가 아니라, ‘짝’과 ‘힘’이라는 두 명사가 합쳐진 복합어로 보아야 할 테다.
‘짝눈’이나 ‘짝귀’에서 보듯, ‘짝’을 접두사로 얹은 명사들은 대체로 슬프다. 그런 슬픈 명사 가운데 하나가 짝사랑이다. 여기서 ‘짝’은 명사일까 접두사일까? 외견상 접두사로 보이기는 한다.
그러나 그것은 그 ‘짝’을 ‘짝짝이’라는 뜻으로 해석했을 때의 경우다. 이 ‘짝’을, 또 다른 짝이 필요한 불완전성의 기호로 해석하면, 명사로 볼 여지도 있다.
‘짝사랑’의 ‘짝??그 둘 다를 뜻할 수 있을 것 같다. 짝사랑은 제 짝을 찾아 완전성을 이루려는 불완전한 한 짝의 사랑이면서, 짝이 틀리게 이뤄져 한쪽 방향으로만 흐르는 사랑이다. 그것은 미완의 사랑이면서 짝짝이 사랑이다.
‘짝짝이’라는 말도 따지고 보면 묘하다. ‘짝’을 두 번 거듭해 놓고선 서로 제 짝이 아니라니. 온전한 켤레가 아니라니. 검정고무신과 흰 고무신은 서로 짝이 아니어서 켤레가 될 수 없다니.
유년기엔 고무신을 무던히 신었다. 집이 어려운 아이들은 검정고무신을 신기도 했다. 우리 집은 아주 어려운 축에는 들지 않았던지, 검정고무신을 신었던 기억은 없다. 맨발에 고무신을 신고 뛰놀다 집에 돌아오면, 발등에서 뒤꿈치를 돌아 다시 발등으로 이어지는 까만 선(땟물)이 생기곤 했다.
고무신이나 ‘쓰레빠’(또는 변형된 ‘게다’)가 운동화로, 구두로, 군화로, 다시 구두로 바뀌는 것이 내 세대 한국 남자들의 성장과정이었다. 여자에겐 군화 대신 부츠가 있었다.
그런데, ‘고무신을 거꾸로 신는다’는 표현의 유래는 뭘까? 운동화나 구두가 그렇듯, 고무신도 거꾸로 신으면 아주 불편하다. 그 불편함은 변심의 벌일까? 아니면 변심이라는 모험의 긴장감일까?
사랑의 주체인 두 호모 사피엔스를 ‘켤레’라 부르는 것은 적절한 한국어 사용법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사랑이 간절한 사랑이라면, 그 둘이 합쳐져야만 한 벌을 이룬다면, 켤레라 못 부를 것도 없겠다.
연애나 결혼을 한다는 것은 두 짝이 한 켤레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사랑 행로는 두 켤레의 신발이 그리는 행로이기도 하다.
옛날에 그 신발은 짚신이거나 나막신이거나 미투리이거나 갖신이었다. ‘짚신도 짝이 있다’는 속담에는 짚신에 대한 경멸이 묻어있는 것 같다. 짚신의 짝은 짚신일 것이다. 왼발에 짚신을 신고 오른발에 갖신을 신으면 ‘짝짝이’가 될 것이다.
그런데, 앞서 내비쳤듯, 사랑은 본디 그런 짝짝이가 아닐까? 여자와 남자는, 암컷과 수컷은 일종의 짝짝이가 아닐까? 짝사랑만이 아니라 (거의) 모든 사랑은 짝짝이 사랑이 아닐까? 생물 차원에선 그런 것 같다.
그러나 사회 차원에선 사정이 다르다. ‘짚신도 제 날이 좋다’는 속담은 제 분수에 맞는 배필을 구하는 것이 좋다는 뜻이다. 여기서 ‘날’이란 ‘씨줄 날줄’ 할 때의 날이다. 신을 삼을 때 씨가 짚이면 날도 짚인 것이 좋다는 뜻.
그것은 계급혼이나 신분혼이 자연스럽다는 뜻이겠다. 진보주의자들은 이 속담에 분개하거나 코웃음을 치겠지만, 거기 만만찮은 진실이 담겨 있는 것도 사실이다. 짚으로 된 씨가 짚으로 된 날과 어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짚신 한 짝은 또 다른 짚신 한 짝과 켤레를 이룬다.
연애·결혼은 한 켤레 신발이 그리는 행로
그런데 이 속담에 담긴 계급이나 신분적 동류의식을 성(性)에도 적용하면 안 될까? 짚신도 제 날이 좋고, 짚신의 짝으로 짚신이 제격이라면, 왜 여자가 여자의 짝이 되면 안 되는 것일까? 왜 남자끼리 한 켤레가 되면 안 되는 것일까? 성(性)은 생물적 갈래일 뿐만 아니라, 사회적 갈래이기도 한데.
전위적 성 해방론자라면, 켤레의 사랑으로는 만족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두름이나 쾌의 사랑을, 심지어 강다리(장작 백 개비)의 사랑을 원할지 모른다.
미술잡지 <아르프레스> 의 창간자인 프랑스인 미술비평가 카트린 밀레는 <카트린 m.의 성생활> (2001)이라는 책에서 어린 시절 이래 자신의 ‘난잡한’ 성 편력을 과감히 털어놓아, 그 때까지의 명성을 갑절로 늘린 바 있다. 사드의 소설들이나 카사노바의 회고록도 켤레의 사랑을 비웃는다. 카트린> 아르프레스>
그러나 문명사회의 호모 사피엔스가 시늉으로라도 실천하고 기리는 것은 켤레의 사랑이다. 그것은 세상과 사람살이가 켤레(낮과 밤, 물질과 정신, 왼쪽과 오른쪽, 추리와 직관 따위)로 이뤄진 것과 조금은 관련이 있는지도 모른다.
객원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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