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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호철 교수 대장정 길을 가다] <11> 잃어버린 930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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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호철 교수 대장정 길을 가다] <11> 잃어버린 930km

입력
2008.07.14 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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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들! 동지들!" 다쉐산(大雪山)을 넘자 제4방면군이 기다리고 있었다. 서로들 끌어안고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그곳이 샤오진(小金)이다. 공안의 통제를 피해 두장옌(都江堰)으로 돌아 원촨(汶川)바로 못 미쳐 쓰꾸냥산(四姑娘山)으로 빠졌다.

지붕이 평평한 장족 특유의 돌집들이 하나 둘씩 나타났다. 산을 한참 올라가자 '해발 4532m'라는 팻말이 보였다. 평생 올라가 본 최고의 고도가 페루 티티카카 호수의 4200m였으니 개인적으로는 기록 갱신이다. 조금 걷자 숨이 찼다. 빙판길을 조심스럽게 내려갔다. 얼마를 갔을까, 앞에 검문소가 나타났다.

이곳부터 외국인 출입금지 구역이라는 것이다. 4532m 고지를 넘어 근 열 시간을 달려 왔는데 여기서 쫓겨난다 말인가? (그러나 곧 이 지역에서 지진이 난 것을 생각하면 공안덕분에 목숨을 구했는지도 모른다).

공안은 500m 앞 언덕에 작은 기념탑이 있으니 거기서 사진 찍고 오는 것은 허락해주겠다고 했다. 붉은 벽돌 위에 하얀 기둥을 세운 소박한 기념탑이 나타났다. '홍군 장정 제1ㆍ4방면군 해후 기념비'라고 씌어 있었다.

아래쪽 붉은 벽돌 벽의 옆면에는 제1방면군, 제4방면군이라고 쓴 깃발아래 두 군의 병사들이 서로 만나 얼싸안고 있는 장면이 부조로 조각되어 있었다.

그를 보니 마오쩌둥(毛澤東)의 제1방면군이 다쉐산을 넘어 제4방면군을 만나 느꼈을 감격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미 여러 책을 통해 이 같은 해후의 행복이 아주 짧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감격은 오래 가지 않았다. 나 역시 달려온 길을 다시 돌아가야 하는 긴 고통의 순간이 찾아왔다.

■ 민족화해의 부부

해발 4532m의 빙판길을 다시 밤에 되돌아 넘는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가까운 곳에서 자기로 했다. 샤오진현의 르륭(日隆)이라는 마을인데 언덕위쪽으로 '정부여관'이라고 쓰인 팻말이 보였다. 르륭의 진(鎭ㆍ우리나라 리에 해당하는 작은 행정단위) 정부건물의 1층에 있는, 진 정부에서 운영하는 여관이었다.

바로 옆에는 경찰서가 있고 건물입구에 '인민정부', '인민무장부', '공산당' 간판이 줄줄이 걸려 있었다. 이 지역이 만에 하나 불상사가 있어도 안전에는 문제가 없을 것 같아 그곳에 묵기로 했다.

사람 좋게 생긴 중년부부가 여관을 운영하고 있었다. 정부에 임대료를 내고 여관을 운영한다고 했다. 나와 동갑인 남편은 한족, 부인은 장족이라고 한다. 최근의 티베트사태 때문에 유심히 관찰했는데 평생 본 부부 중 가장 금실이 좋았다.

너무도 선한 인상의 두 부부, 그리고 평생 싸움 한 번 안 했을 것처럼 느껴지는 부부를 보고 있자니 이들이야말로 민족화해의 전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족과 장족이 이들과 같이 서로 사랑하고 공존할 수 있다면 티베트사태와 같은 비극은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에 그들이 아름답게 느껴졌다.

■ 두 번째 좌절

두 차례의 좌절로 생각해둔 비상대책을 실행에 옮겼다. 쓰촨(四川) 북부지역과 간쑤(甘肅)성은 출입이 금지된 장족 지역이니 회족 자치주인 링샤(宁夏)의 수도 인촨(銀川)으로 날아가 거기서 차를 빌려 거꾸로 동쪽으로 올 수 있는 곳까지 온 뒤 그곳부터 다시 서쪽으로 다시 장정을 계속하는 것이다.

그럴 경우 쑹판(松潘)초지 등 약 930km 구간을 빼먹게 되는데 그 구간은 외국인 출입금지가 풀린 뒤 다시 오는 수밖에 없었다. 결정을 하고 나자 허탈해졌다. 눈을 감고 가지 못하게 된, 즉 잃어버린 930km를 복기해보았다.

샤오진에 도착한 마오는 1935년 6월25일 제4방면군의 사령관 장궈타오(張國燾)와 만났다. 마오는 북으로 진군해 간쑤와 싼시(陝西)성에 근거지를 만들자고 주장한 반면 쓰촨에 기반을 갖고 있던 장은 쓰촨을 벗어나는 것에 부정적이었다.

의견을 조율하느라 홍군은 근 두 달을 이 지역에서 허비했다. 결국 저우언라이(周恩來)가 갖고 있던 군사위원회 총정치위원 자리를 장꿔타오에게 내주고야 북상 합의를 얻어냈다.

마오의 군대는 간쑤성으로 올라가기 위해 쑹판초지를 통과해야 했다. 끝없는 풀밭과 아름다운 들꽃 속에는 마르지 않는 물이 숨어 있었고 그 물들이 모여 죽음의 늪을 이루고 있었다.

멀쩡한 땅이 갑자기 끝없는 심연으로 변해 늪 속으로 말과 홍군을 삼켜 버렸다. 게다가 이곳 고원지대는 8월 한 여름에도 우박이 쏟아지고 살을 에는 추위가 찾아왔다. 마실 물도 구할 수 없었다. 고인 물들은 녹슨 것처럼 붉은 색을 띄고 있었는데 마시면 배탈이 나고 이질에 걸렸다.

제대로 잠 잘만한 곳도 없었다. 수많은 병사들이 동사하거나 굶어죽거나 늪에 빠져 죽었다. 먹을 것이 없는 병사들은 소가죽으로 만든 허리띠를 씹어 먹으며 허기를 달랬다. 일주일 걸려 초지를 통과했을 때 살아남은 병사는 얼마 되지 않았다.

■ 장족에 진 빚

"내가 장정 중 외국에 진 빚은 장족에게 진 빚이 전부입니다. 언젠가 우리는 그들에게서 빼앗아 온 것들을 돌려줄 것입니다." 마오는 1936년 에드거 스노와의 면담에서 이처럼 말했다. 마오 스스로 홍군이 그토록 중요시 여기던 '8개 주의사항'(농민의 것을 훔치지 말라 등)을 장족에게는 어겼다는 것을 인정한 것이다.

왜 그 같은 사태가 발생했을까? 두 가지 이유이다. 쓰촨 북쪽의 장족 지역은 유목지로서 인구가 적고 식량이 부족했다. 그곳에 수많은 홍군이 들이닥쳤으니 식량부족 사태는 뻔한 것이었다.

당시 그 지역에는 약 22만명의 장족이 살고 있었고 식량은 자급자족을 하고 조금 남을 정도였다. 그런데 10만 대군이 들어온 것이다. 둘째, 장궈타오와의 논쟁으로 이곳에 너무 오랜 시간(92일) 머문 것이다. 장족은 한족을 좋아하지 않았다.

장제스(張介石)는 라마고승을 자신의 특별보좌관으로 임명해 공산주의는 라마교와 장족의 적이라는 것을 설교하는 한편 이들에게 무기를 제공했다. 숨기지 않는 곡물은 압수하고, 홍군에게 곡물이나 식량을 팔면 처형하겠다고 협박했던 것이다.

따라서 홍군이 이 지역에 들어갔을 때 장족은 다 숨어버리고 아무 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식량을 살 수도 없었고 대지주의 식량을 징발할 수도 없었다. 결국 밭에서 여물고 있는 보리를 무단으로 베어 먹어야 했고 장족들이 키우는 야크를 잡아먹어야 했다.

자신들의 생명줄인 식량을 빼앗기자 장족은 기회 있을 때마다 홍군을 공격했다. 결국 이들간의 악연은 1950년 홍군의 티베트 점령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니 상당히 오래 된 셈이다.

중국 공산당이 티베트 침공을 정당화하면서 사용하는 논리(티베트의 전통질서는 봉건적 사원경제의 압제체제이며 홍군이 티베트민중을 이 압제로부터 해방시켜줬다는 주장)도 바로 장정의 경험에 기초한 것이다.

홍군은 쓰촨 서북부의 한 사원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승려 1,000명의 이 절은 홍군이 협상 특사로 보낸 장교를 세 번이나 죽여 버렸고, 승려들은 밤에 말 타고 사원 밖으로 달려 나와 홍군들의 목을 베었다. 홍군이 접근하면 총격을 가하고 폭탄을 던졌다.

홍군은 한 달이나 계속된 전투 끝에 1,000명의 병사를 잃은 뒤에야 사원을 점령할 수 있었다. 사원에 들어가자 홍군은 충격에 빠졌다. 방마다 곡식과 말린 야크 고기, 소금, 설탕 등 먹을 것이 가득 넘쳐 났기 때문이었다.

밖에서는 사람들이 굶고 있는데 사원에는 먹을 것이 넘쳐 나다니. 이를 보면서 홍군은 티베트사회가 민중의 고혈을 짜는 봉건적 사원경제체제라는 생각을 가지게 됐다. 그러나 앞서 지적했듯 그렇다 하더라도 이를 티베트민중 자신이 아니라 외부세력이 대신 해방시켜 주겠다고 한 것은 잘못이다.

서강대 정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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