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대들이 촛불을 들었다. 이에 대한 해석도 다양하다. 본격적인 정치참여 신호탄으로 보는 견해도 있고 논술의 영향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이들은 왜 촛불을 들고 나왔을까. 유행을 좇는 것과 같은 철없는 휩쓸림일까. 아니면 나름의 판단과 생각에서였을까.
이번 촛불은 교육적으로도 고민을 하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적어도 교사들이라면 시위에 참여하는 학생들을 보면서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여기에 문제를 정치로 풀어야 할 국회의원들마저 촛불 그림자를 따라다녔으니. 부연(附椽)하자면, 국회란 곳이 갈등을 조율ㆍ조정하는 곳이지 조장하는 곳은 아니지 않던가.
물론 학생들도 자유롭게 의사를 표현할 권리가 있다. 이는 학생 이전에 한 인간으로서 지니는 당연한 권리다. 이런 점에서 이들을 집회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막을 수 있는 명분은 없다. 그럼에도 학생들이 광장으로 직접 나서는 것은 긍정적이지 못하다. 이유는 두 가지다. 성인과 달리 행위에 따른 책임을 묻기 어렵다는 점, 심리적 특성 상 감각적, 감정적 판단의 오류와 가변성 때문이다.
그런데도 이들에게 촛불을 들게 만드는 사람들이 있다. 일부 교사들이다. 이들은 광우병 촛불광고를 위해 모금까지 하려했다. 이 뿐만이 아니다. 왜곡된 계기수업도 했다. 물론 계기수업 자체가 문제될 이유는 없다. 객관성을 상실한 수업이 문제란 의미다. 모두 잘 알 듯, 객관성 확보의 실패는 수업실패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특히 정의의 문제가 아닌 의견의 차이 문제는 더욱 그렇다.
이런 경우 교사들은 학생들에게 스스로 판단할 수 있도록 자유롭게 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다. 이 대목에서 교육을 포기한 처사라고 성급하게 오해는 마시라. 학생들 스스로 판단할 수 있도록 돕는다는 의미니까. 이와 관련, 비폭력 전도사 달라이라마의 가르침은 교육에서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균형감각을 갖는 것, 즉 극단을 피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한 그루의 묘목을 심는다면, 처음엔 아주 기술적이고 조심스럽게 나무를 다루어야 한다. 너무 많은 수분은 묘목을 죽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또 너무 많은 햇볕을 받아도 같은 결과가 나타난다. 물론 이런 것들이 너무 작아도 같은 결과가 나타날 것이다. 따라서 당신이 해야 할 일은 묘목이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는 균형 잡힌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이다.”
그렇다. 바로 균형이다. 일부 교사들은 경도(傾倒)된 시각과 정보로 십대들을 부추길 필요는 없다. 균형 잡힌 시각에서가 아니라면 학생들 스스로 판단할 수 있도록 자유롭게 하는 것이 좋다.
한병선 교육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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