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중반 들어선 서울의 한 어린이집. 조용한 주택가에 자리하고 차량 통행도 거의 없어 학부모들은 안심하고 아이들을 맡길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사정은 오래 가지 못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주택들은 리모델링을 통해 상가 건물로 변신했다. 미용실 의상실 주점 등이 잇따라 들어섰고, 차량은 덩달아 빠른 속도로 늘어났다.
어린이집 앞길은 어느 새 차도로 변해버렸다. 애초부터 좁았던 도로는 차 한 대가 지나갈 경우 사람이 피할 수 없는 상황에 처했다. 인도와 차도의 구분은 아예 없다. 그 흔한 과속방지턱은 다른 동네 이야기다.
10일 오후 4시께 어린이집 앞 길. 차와 아이들이 뒤엉키는 아슬아슬한 장면이 거듭 연출됐다. 어린 아이들의 생명이 위협받는 순간이지만, 보호장치는 전무하다.
참다못한 어린이집측은 해당 구청에 ‘스쿨존(어린이 보호구역)’으로 지정해달라고 요구했지만, “불가능하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스쿨존은 100명 이상이 다니는 학교와 어린이집 등 보육시설에 한해 설정되는 바람에 70여명 정원이 전부인 이 어린이집은 적용되지 않았다. 구청 가정복지과 관계자는 “어린이집 사정은 알지만 스쿨존 지정 대상이 안돼 어쩔 수 없다”고 말했다.
어린이들이 각종 교통사고 위험에 직접 노출해 있지만 이를 막기 위한 제도는 현실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우리나라 어린이 교통사고 사망자수는 세계 최고 수준. 10만명 당 3.10명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 30개 회원국 중 1위다. 가장 낮은 스웨덴과 비해 5배나 높다.
특히 취학 전 어린이들의 사고 위험 노출은 심각한 양상이다. 지난해말 현재 교통사고 사상자 중 취학 전 아동 비율은 40%로 초등학생(41%) 비슷하다. 2006년에는 47.2%로 가장 높았다. 어린이 교통사고 사망자 10명 중 7명은 보행 중 사고로 변을 당하고 있다.
정부도 이런 실정을 감안해 스쿨존 사업 등의 대책을 마련했지만, ‘법 따로, 현실 따로’ 현상이 계속되고 있다. 학생 수가 100명이 안되는 어린이 집은 스쿨존이 '그림의 떡’이다.
보육시설 업계에 따르면 7월 현재 국내 전체 보육시설은 3만여개. 이 중 2% 정도만 스쿨존 혜택을 받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대다수 보육시설이 안전의 사각지대에 처한 것이다.
4세 딸을 어린이집에 보내고 있는 박모(38ㆍ여. 서울 동작구 사당동)씨는 “스쿨존 설치는 원생 수보다 도로사정이나 차량 통행량 등을 따져 결정하는게 순리”라며 “현실을 반영하지 못한 제도라면 존치할 필요가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스쿨존
초등학교나 100인 이상의 보육시설 주변 어린이보호구역을 말한다. 스쿨존이 설치되면 반경 500미터에 안전표지를 설치하고 차량 속도는 시속 30km 이하로 규제되며 도로에는 과속방지턱을 설치해야 한다. 학교장(보육시설 원장)이 관할 구에 건의하면 구는 관할 경찰서장에게 요청하고, 서장이 스쿨존으로 최종 지정하게 된다.
이대혁 기자 selected@hk.co.kr강희경기자 kbsta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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