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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영 기자의 Who's Now] '오케스트라 부흥사' 함신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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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영 기자의 Who's Now] '오케스트라 부흥사' 함신익

입력
2008.07.14 0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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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에 히딩크가 있다면, 오케스트라에는 이 사람이 있다. 비실비실한 오케스트라에 메스를 들이대 수준급 오케스트라로 회생시키는 데 탁월한 능력을 갖춘 지휘자, 함신익(50) 예일대 교수. 그래서 그에겐 늘상 ‘오케스트라의 부흥사’라는 별명이 따라다닌다.

그가 대전시향 상임지휘자를 그만두고 미국으로 돌아간 지 1년 반 만에 한국을 다시 찾았다. 예일 필하모니아 서울 콘서트와 고양시립합창단 공연, 자서전 <함토벤> 의 전면개정판 발행 등 겸사겸사의 방문이다. 8일 오후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연습실에서 그를 만났다. 세간의 평판처럼 열정적이고, 야심만만했으며, 달변이었다.

- 듣자 하니 <함토벤> 의 개정판을 본인이 먼저 내자고 했다던데요.

“책이 망했잖아요. 출판사에서 먼저 제안해온 책인데, 솔직히 창피하잖아요, 뭐 내세울 것도 없고. 그래서 막상 만들어놓고도 전혀 홍보를 안 했어요. 그런데 2~3년 지나고 읽어보니까 너무 부끄러운 거예요. 논리 있게, 짜임새 있게 써야 되는데, 구성, 밀도가 떨어지게 썼더라구요. 이러니까 안 읽었지 싶어서 거의 새로 썼어요.

후배들에게, 동료들에게, 다른 분야의 CEO나 리더들에게 나의 실패를 근거로 미국 사회의 치열한 경쟁, 거기서 내가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는가를 들려주고 싶었어요. 음악 하는 사람이지만 제가 하는 건 리더로서 하는 일이기 때문에 누가 읽어도 도움이 될 수 있을 겁니다.”

- 책을 보면 리더십에 관한 얘기가 굉장히 인상적이에요. 지휘자에겐 특히 중요한 덕목인데, 선생님이 가진 리더십의 어떤 면이 오늘날의 성공을 가져온 거라고 보십니까?

“가장 중요한 건 자기 분야에서의 풍부한 지식과 경험이죠. 그것 없이 리더십만 있다고 되는 게 아니에요. 속 안은 텅텅 비었는데 그걸 포장 잘 해봤자 1년은 갈 수 있을지 모르지만, 15년, 20년은 못 가잖아요. 사실은 클래식 시장이 어두워요. 옛날 모차르트, 베토벤, 스트라빈스키 시대는 클래식 음악이 가장 행복한 시기였죠.

그 이외의 오락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오락이 너무 많아요. 클래식 음악은 아주 작은 부분이고. 심지어는 모차르트 음악마저도 인정을 못 받는 그런 시대예요.

이런 시대에 이 아름다운 음악을 어떻게 감동적으로 전달하는가, 그리고 그 수요층을 어떻게 하면 점점 두터워지게 만들 수 있는가, 그것은 우리의 사명이에요. 좋은 음악을 좋게 포장해서 알기 쉽게 전달하는 것, 그분들이 점점 좋은 수준의 소비자가 되도록 만들어내는 형태의 리더십을 전 추구하고 있어요.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그런 매체들을 설득시켜서 내 편으로 만드는 것도 저의 목표입니다. 그게 아마 미국에서 많이 통했고, 한국에서도 통했던 것 같아요. 앞으로도 그런 길로 가야 한다는 건 감이 잡혀요.”

- 그 길은 구체적으로 어떤 길이죠?

“이제는 바뀌어야 된다, 클래식 음악인들이. 베토벤, 모차르트 시대와 똑같은 방식으로 음악에 접근해서는 안되고, 특히 지휘자들은 더 바뀌어야 돼요. 완전히 낮은 상태에서 새로 시작해야 돼요. 저는 정말 폭발력 있는, 감동이 있는 오케스트라, 단원들과 내가 한 팀으로서 우리나라 오케스트라의 새로운 역사를 쓰고 싶어요.

그게 곧 올 거예요. 그러기 위해서는 제가 새로운 오케스트라를 만드는 게 훨씬 낫겠죠. 기존 오케스트라들의 체제를 내가 변화시킨다는 건 혁명이에요. 나는 혁명보다는 진화를 원해요. 에볼루션(evolution), 레볼루션(revolution)에서 ‘r’자를 하나 떼라. 지금 상태에서 진화하자. 새로운 르네상스! 그걸 마련하는 게 저의 목표죠.”

- 거점을 한국으로 옮기신다는 말씀처럼 들려요.

“아니오. 국제적으로! 저는 한국에만 있으면 못 큽니다. 제가 큰 이유는 본거지가 미국이기 때문이에요. 여기서 연주를 마치고 인천공항에서 비행기가 뜰 때면 내가 왜 그렇게 했을까 그런 반성을 자꾸 해야 돼요. 이 넓은 우주에서 내가 왜 그렇게 좁게 봤을까. 여기 지휘자들은 기회가 되면 외국에 막 나가야 돼요. 그게 몽골이든지, 카자흐스탄이든지, 미국이든지, 영국이든지, 멕시코든지, 어디든 가서 계속 자극과 영감을 받아야 해요. 잘못하면 마취가 돼버려요. 그땐 그 상태로 편하게 자는 거죠.

우리 음악인은 늘 각성돼 있어야 해요. 나는 이해할 수 없는 게 음악을 하는 사람들이 게을러지려 그러고, 편하게 하려 그러고, 그런 게 저랑 가장 큰 마찰이에요. 그래서 진화하는, 자기 스스로 개발하는 음악단체를 많이 만드는 게 가장 시급한 일이에요. 괜히 저 같이 열심히 뭘 좀 해보려는 사람이 이상하게 보이는 사회가 되면 안되죠.”

가난한 산동네 개척교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교회 찬송가 반주를 하며 거의 독학하다시피 피아노를 배웠다. 고등학교 때까지 집에 피아노는커녕, 전축 하나 없는 형편이었다.

건국대 음대를 졸업한 후 단돈 400달러를 들고 미국으로 유학을 간 게 스물 여섯 나이. 지휘자의 꿈을 안고 태평양을 건너온 이 가난한 고학생은 그를 알아본 교수들의 도움과 장학금에 의존해 라이스 대학에서 석사 학위를 받고, 이스트만 음악학교에서 지휘자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이후 미국 애벌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필하모닉의 상임지휘자와 여러 오케스트라의 객원지휘자로 일하면서 ‘오케스트라 부흥사’로서의 역량을 만방에 과시했다. 이때 보여준 열정과 재능이 기적적으로 명문 예일대의 교수가 되는 밑거름이 됐다.

- 예일대 교수라는 직함이 화려해요. 예일대는 젊은 지휘자 함신익한테 뭘 뽑아먹으려고 교수로 채용했을까요?

“예일대학원 교수가 된 지 4년 됐어요. 학부 교수와는 전혀 다른 별개의 직종이거든요. 학부는 95년부터 9년간 했는데, 그때 능력을 인정받아 스카우트 된 것 같아요. 사람들이 말하기를, 함신익은 감동이 있는 음악을 만든다, 열정적이다, 그래요. 제가 허점투성이고, 영어도 그 똑똑한 예일놈들을 어떻게 당하겠습니까.

맨 처음 미국 가서 타이탄(Titan)을 티탄이라고 읽었던 사람인데. 그런 엉터리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음악적으로 감동을 주고, 음악적으로 커뮤니케이션을 했기 때문이에요. 제가 비교적 젊은 나이에 예일 교수가 된 건, 제가 갖고 있던 ‘마이 오케스트라’라는 생각 때문일 거예요. ‘잇츠 유어 오케스트라, 뭘 좀 도와줄까?’ 이렇게 접근하는 노장들과는 달랐으니까.”

- 지휘자와 교수의 길을 동시에 가고 있는데, 교수직의 매력은 뭐예요?

“사실 난 프로지휘자의 길을 원했었어요. 맨 처음 지휘로 데뷔할 때, 아무 이유 없이 뉴욕 근처로 이사를 왔어요. 나는 지휘만 한다 하는 생각으로. 애가 커지면서 프리랜서를 엄청 하게 됐는데, 힘들더라구요. 내가 이렇게 살아야 되나. 연주로만 매주 비행기 너댓 번을 타가면서 왔다갔다 하는데 그게 행복하지가 않아요.

가족을 좀더 존중하며 살아야겠다, 일을 좀 줄여야겠다, 생각하고 있는데 예일에서 공고가 난 거예요. 그래서 우연히 시작한 건데, 하나님께서 나한테 특별한 기회를 주신 건, 정말 음악에 대한 열정이 있는 아이들을 만나게 해주셨다는 거죠.

그 당시 프로 오케스트라랑도 같이 돌아다녔지만, 예일 학부 애들, 기량은 좀 떨어질지 모르지만 음악에 대한 열정을 가진 얘들만큼 영감을 주진 못했어요. 이런 데서 감동과 영감을 얻는 게 뉴욕필하모닉 가는 것보다 더 좋은 거구나, 싶었죠.”

- 가난한 집 출신들은 사실 음악을 하기가 힘든 게 요즘 실정이에요. 문화적으로도 척박한 어린시절을 보내게 되고. 그런데 책에 보니까 “가난이 내 음악의 원동력”이라고 쓰셨더라구요.

“나는 고등학교 때까지 집에 피아노는 물론 TV, 전축 같은 것도 없었어요. 그래서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기회란 게 세종문화회관, 이대강당 같은 공연장에 몰래 뒷담으로 들어가 듣는 것밖에 없었죠. 하지만 난 생활이 음악이었어요.

어려서부터 예원예고를 가고, 서울대를 가고, 그런 목표가 있었던 게 아니라 그냥 삶에서 나오는 음악을 했던 거예요. 삶의 랭귀지로서의 음악. 가난해 보기도 했고, 지금 부자는 아니지만 어쨌든 먹고 살고, 그런 생활 속에서 삶을 알게 되는 거지, 어머니가 데려다 주는 차 안에서 음악 듣고, 레슨 받고, 집에 와서 또 새끼선생한테 레슨 받고, 이런 생활 속에서 어떻게 세상을 꿈꾸며 넓은 하늘을 볼 수 있겠어요.

제가 며칠 전에 몽골 국립오케스트라 지휘를 하러 다녀왔는데, 단원들한테 그랬어요. ‘내가 돈도 안 받고 여기 왜 온지 아십니까. 내가 받은 사랑을 전해주기 위해서다.’ 요즘 드는 생각은 미국 선교사가 아니었으면 내가 지금 여기 와 있을 리가 없다는 거예요. 학교도 세워주고, 음악도 전달해 주고, 그런 혜택을 받은 게 나예요.

미국에서도 도움을, 사랑을 너무 많이 받았는데, 이걸 어떻게 보답해야 되나, 한번은 내 은사 모슬링 선생한테 물어봤어요. 그랬더니 ‘Pass it on’, 그게 대답이에요. 다른 사람한테 전하라. 난 앞으로 어려운 사람들 돕는 걸 아끼지 않을 거예요.

몽골단원들한테 그랬어요. ‘나는 여러분보다 더 열악한 환경에서 자랐다. 나는 피아노가 없이 피아니스트가 되길 꿈꿨으며, 음악도 들어보지 못하고 베토벤을 논했고, 가진 것도 없이 미국을 갔다.

이제 내가 받은 걸 여러분에게 나누고 싶다. 여러분도 언제 어디서 누군가 당신을 도와줄 테니 실망하지 말아라.’ 그랬더니 다들 울더라구요. 난 감동이 있는 음악가, 사람들과 나눌 수 있는 지휘자가 되고 싶어요.”

- 어느 사회나 다 그렇지만 음악계는 특히 학벌의 위계가 심하잖아요. 설움 없으셨어요?

“많죠. 한국은 순위가 너무 분명하잖아요. 그것 때문에 혜택도 보고. 하지만 미국?덜해요. 실력을 더 높이 치죠. 예일 음대에는 예일대 출신 교수가 한 명뿐이에요. 음악인이면 음악만 잘하면 돼요.

나처럼 연주교수 중에는 박사학위 가진 사람이 없어요. 대학과정은 어차피 ‘인트로덕션’(도입부)이고. 우리 딸한테도 ‘대학은 아무데나 가라, 거기서 니가 하고 싶은 걸 결정해라’, 그래요. 하지만 대학원은 잘 결정해야 하죠.

설움보다는 그런 부조리가 체질에 안 맞았어요. 저처럼 음악을 늦게 시작하고, 장학금과 나한테 맞는 선생님을 찾아가려면 그 대학을 갈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런데 그걸 다 무시하고 ‘너는 왜 서울대를 안 나왔냐’ 이런 식으로 나오면 할 말이 없죠. 불합리하니까 나는 빨리 미국으로 간 거죠.”

- 외동딸을 두셨는데, 따님도 음악을 시키셨나요.

“아니오. 지금 고등학생인데, 글 쓰기를 참 잘해요. 그래서 변호사 쪽으로 나가지 않을까 싶어요.”

- 결혼할 때 얘기 좀 들려주세요. 책에는 ‘혼자 먹고 살기 힘들어서 결혼해야겠다 결심했다’고 써있는데, 부인이 보고 화내지 않으세요?

“정말 필요했어요, 그때는. 미국에서 혼자 사는 게 정말 힘들었거든요.”

- 그래도 반해서, 사랑해서 결혼했다고 하셔야죠.

“그런 건 아니에요, 솔직히. 지금은 없으면 못 살겠지만. 그런데 그게 계시었어요. 제가 시카고로 LA로, 미국 순회 연주가 아니라 순회 선을 보러 다녔는데, 다른 여자들은 점수를 매겨보면 보통 30점밖에 안 나와요.

그런데 우리 와이프는 보자마자 98점이 나오더라구요. 사실 그 전에 연애를 했었는데, 그 여자가 갑자기 시집을 가버렸어요. 그래서 결혼할 아주 순수한 여자를 찾았어요. 해보니까 연애가 필요 없더라구요, 그게 결혼이랑 연결되는 것도 아니고.

우리는 두 번째 만났을 때 약혼을 했어요. 처음 만난 게 내 기숙사 방이었고. 장모님이랑 같이 뉴욕에서 휴스턴으로 내려와서 나를 선 본 건데, 그때 라면을 끓여드렸어요. 나 사는 거 그대로 보시라고. 그리고 몇 달 있다 뉴욕으로 오라길래 가니까 ‘온 김에 약혼하고 가라우’ 하시더라구요. 그리고 세 번째 만난 게 결혼식이었어요.

우리 와이프를 만났으니까 내가 오늘에 있지, 다른 사람을 만났더라면 지금 식당 매니저나 하고 있을 거예요. 다른 여자들은 빨리 돈 벌어오라고 닦달을 했으니까. 우리 와이프는 끝까지 나를 믿고 내 일을 하게 해준 사람이에요. 지금도.”

- 부인께서는 뭘 보고 가난한 유학생한테 미래를 맡겼을까요?

“아마 자신감? 가난도 부끄러워 하지 않는. 장모님이 그러셨대요. 돈 있어봤지만, 그거 있다고 행복한 거 아니다. 대단히 잘 본 거죠. 아주 봉 잡았지.(웃음) 나를 버리고 간 그 친구는 후회하고 있다고 소문이 났어요.”

2000년 대전시향 상임지휘자로 고국을 다시 찾은 함신익은 존재마저 희미했던 이 오케스트라를 화제의 중심에 올려놓았다. 축구선수 차림으로 등장한 지휘자와 무대 위를 뛰어다니며 음악과 함께 노는 어린이들, 대중가수 쥬얼리를 등장시킨 파격적인 무대는 클래식의 문턱을 낮춘 모범적 사례로 연일 신문에 오르내렸고, 시향의 연주 역량도 해외 공연에 나설 만큼 급격히 성장했다.

하지만 결말까지 좋았던 건 아니다. 그는 단원들과의 갈등으로 재계약을 못한 채 “한국 오케스트라는 잘하든 못하든 똑같은 대우를 받으려는 사회주의 불치병에 걸렸다”는 쓴소리를 남기고 6년 만에 한국을 떠났다.

- 대전시향을 6년 만에 번듯하게 키워내면서 오케스트라 부흥사라는 별명을 국내에서도 입증했어요. 비결이 뭐죠?

“지지 않으려는 못된 성격이 있어서 그런 것 같아요. 나이가 50이 됐는데 예일대 스무 살짜리들이랑 농구를 해도 제가 아직 안 져요. 축구를 해도 그렇고, 왜 그렇게 안 지려고 하는지. 그런 의식이 좀 꺼져야 되는데, 일단 승부에 들어가면 전 지고 싶지가 않아요. 큰 단점이죠.

하지만 이젠 많이 죽었어요. 내가 작아지는 걸 용납하는 때가 온 것 같아요. 그동안 목표 위주의 생활을 했단 말이에요. 내 목표는 이 오케스트라의 최고의 음악을 만드는 거죠. 대전시향도 마찬가지고. 대전시향은 연습장소가 없어 지하에 청소하는 아주머니들이 쉬는 방을 개조해서 연습실 만드는 것부터 시작해서 끌어올렸어요.

처음 가서 단원들한테 ‘대전시향이 대한민국에서 몇 번째 가는 오케스트라라고 생각하십니까?’ 물었더니 ‘글씨유. 꼴찌거나 꼴찌에서 두 번째 정도 가겠쥬’ 그래요. 완전히 자포자기 상태인데 그 때도 저의 목표는 오로지 좋은 오케스트라를 만드는 거였어요.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과정이었다는 걸 그땐 몰랐죠. 그 과정 속에서 단원들과 어떻게 어울리고 어떤 대화를 나눠야 하는지 몰랐던 거예요. 그저 목표를 위해서, 누구도 나의 길을 침해할 수 없다, 그냥 뻗어나간 거예요.

이젠 그런 것이 바뀌었어요. 저 사람들 위주로 생각해보자. 餠便湧?쪼아서 하는 방식은 안 되고 풀어주면서 인간적으로 해야 해요. ‘헬프 미. 내가 이 일을 이렇게 하고 싶은데 너희들의 도움이 필요하다. 플리즈, 헬프 미’ 이렇게 도움을 청하는 방식으로 바뀌었어요, 한 2년 전부터.”

- 그런 변화가 단원들과의 갈등으로 대전시향 그만두면서 생긴 건가요?

“그만두면서 그랬어요. 갈등은 뭐 제가 좀 인간적이지 못하고 독단적인 거, 목표 위주로 갔으니까 그걸 우려하는 일부 단원들이 있었죠. 그런 게 계기가 됐어요. 이제 또 나이가 그러니까. 내가 실력이 있다고 내세워서 실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이젠 꼭 그렇게 나를 내세울 필요가 없는 때가 온 것 같아요.”

- 한국 오케스트라에 마지막으로 남긴 쓴소리 때문에 좀 서먹해지지는 않으셨어요?

“단원들은 그렇게 생각할지 모르죠. 하지만 나는 여기에 본거지를 둔 사람이 아니잖아요. 나 아니면 누가 그런 말을 해요.”

- 앞으로의 꿈은 뭐예요? 오케스트라의 부흥사도 좋지만, 최고 기량을 가진 플레이어들이 있는 오케스트라도 지휘해보고 싶을 것 같은데.

“지금 그런 꿈이 있어요. 해야죠. 내년엔 ‘필하모닉 오브 더 네이션스’, EU에서 만든 오케스트라를 비롯해 유럽 오케스트라 객원지휘를 몇 개 해요. 제 소원은 세계적인, 기존 시스템에서 벗어난 새로운 형태의 민간 오케스트라를 만드는 거예요. 한국의 삼성, LG, 한화 이런 데서 직원 50명 대는 건 사실 큰 일이 아니잖아요.

홍보비 100분의 1로 엄청난 홍보를 할 수 있는 게 오케스트라예요. 삼성오케스트라 하나 만들죠, 그걸로 해외 순회연주 다니면 얼마나 이미지 좋아져요. 이병철 홀도 하나 짓고. 문화투자 중 가장 화려하게 꽃을 피울 수 있는 게 오케스트라예요. 그래봤자 그림 한 점 값밖에 안되고. 나에게 50억만 달라. 미국에서 모든 걸 가져와 한국에 투자하겠다. 지금 그 커넥션을 만드는 과정에 있어요.”

- 그동안 참 많은 오케스트라를 지휘해보셨는데 가장 인상적인 곳을 꼽는다면 어딜까요?

“많죠. 몽골 국립오케스트라도 그렇고, 멕시코, 스페인 다 그래요. 대전시향을 데리고 볼티모어로 연주 갔던 것도 그중 하나예요. 미국 투어 스케줄이 너무 무리해서 제가 무대에서 거의 졸도를 했어요. 마지막 곡 마지막 악장에서 숨이 안 쉬어지고, 소리가 안 들려요. 앞이 안 보이는 와중에 지휘를 하는데 거의 환각이더군요.

끝나자마자 가까스로 무대 뒤로 들어와서 바로 앰뷸런스를 불렀어요. 극적이려면 쓰러졌어야 하는데 앰뷸런스 부를 정신은 있더라구요. 그때 커튼콜에도 무대에 다시 못 나가면서 생각했어요. ‘무대에서 죽는다는 말은 안 해야겠다, 그건 슬픈 거다.’ 가려면 다 끝내고 조용히 가야지 않겠어요?(웃음)”

aurevoir@hk.co.kr사진=신상순기자 ssshi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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