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론장에서 누군가의 인격을 ‘추레하다’고 헐뜯는 것은 제 인격의 추레함을 드러내는 짓이다. 그 짓을, 비록 일종의 비유이긴 했지만, 두 주 전 칼럼 ☞<인격이 사교술이 아니라면> 에서 내가 저질렀다. 강준만 교수의 ‘인격론’을 따져본 그 칼럼에서 나는, <한국근현대사> (소위 ‘뉴라이트’ 대안 교과서)의 책임편집자 이영훈 교수(서울대 경제학부)가 <시사in> (제29호)과 한 인터뷰를 거론하며, “이 소문난 ‘실증주의자’의 반(反)실증주의적 언동도 어처구니없지만, 인격의 사적 영역을 경시할 때, 그의 (공적으로 ‘추레한’) 인격은 그의 (역시 공적으로 ‘추레한’) 이념의 속살일 뿐”이라고 썼다. 시사in> 한국근현대사> 인격이>
'실증주의자'의 反실증주의
그 칼럼을 읽은 독자 한 분이 기다란 메일을 보내 주셨다. ‘뉴라이트운동을 지지하는 직장인’이라고 밝힌 그는 ‘자신이 동의하지 않는 이념과 그 이데올로그의 인격’을 ‘추레하다’고 표현한 내 ‘독선’에 ‘크게 실망했다’고 썼다. 그런데 그 큰 실망을 털어놓는 메일이 너무 예의발라서, 나는 잠시 얼떨떨했다. 소위 ‘뉴라이트’에 대해 편견을 지닌 나는 그 쪽 사람들을 죄다 ‘머리에 뿔난 도깨비’(과장된 농담이다) 쯤으로 여기고 있었는데, 이 독자는 적어도 나보다는 인격이 훌륭했던 것이다. 이 글은 그 독자에게 보낸 답신을 줄인 것이다.
이영훈은 그 인터뷰에서 “박정희의 10월유신도 정당했다고 보는 것 같다”는 기자의 말에 이렇게 답했다. “한 개인의 권력욕만으로는 충분히 설명될 수 없는 커다란 변화를 한국인에게 안겨 주었다고 썼다. 이미 죽은 사람이지만 자주 대화를 한다. 당신은 무엇을 위해서 그런 선택을 했냐고. 1979년 10월 그가 죽은 뒤 수백 명이 정치적 자유를 얻었다. 그 희생으로 중화학공업화와 경제성장을 이룬 것이다.
그런데 얼마나 큰 희생이었나? 노예처럼 끌려가 채찍 맞고 그런 것은 아니지 않나? 국회의원, 대통령을 하고 싶었는데 한동안 못했을 뿐이다. 대한민국 국민은 오대양 육대주를 누비며 역사상 유례없는 시대를 만들었다. 당시 중화학공업을 발전시키지 않았으면 지금 대한민국이 과연 어디에 있었을지 암담할 따름이다.”
이것은 내 기억과 다르다. 내 기억이 옳다면, 10월유신은 국회 해산과 함께 일부 국회의원들이 군부대로 끌려가 ‘노예처럼’ 고문 당하는 것으로 막을 올렸다. 박정희가 죽은 뒤 정치적 자유를 얻은 것은 감옥에서 풀려난 수백 명의 정치범들만이 아니었다. 잠깐 동안이긴 했지만, 대한민국 시민 전체가 줄잡아도 7년 만에야 자유를 숨쉴 수 있었다.
5ㆍ16 군사쿠데타로 수립된 제3공화국의 통치도 사뭇 억압적이었지만, 10월유신이 분만한 소위 제4공화국은, 한 시인의 표현대로, ‘겨울공화국’이었다. 박정희의 이름난 정적들이 당한 박해는 사실 별 것 아니다. 소위 인혁당 재건위 사건처럼 잘 알려진 간첩조작사건이 아니더라도, 납북 어부들의 가족을 비롯한 대한민국 천지의 ‘재수없는’ 장삼이사들이 간첩으로 몰려 끔찍한 고문을 당하고, 기약없는 옥살이를 하고, 때로는 살해됐다. 그 시기의 한국은 시민들 전체가 감시의 눈길을 내면화한 원형감옥이었다.
기억을 왜곡하는 이념과 인격
이영훈의 기억보다 훨씬 더 가혹했던 이 공포체제가 중화학공업을 기반으로 한 경제성장과 어느 정도 상관관계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이영훈이 암시하듯 경제성장을 위해서 그 ‘희생’이 필요했다 하더라도, 그 시대를 긍정하는 사람의 인격과 이념은 ‘추레하다’고밖에 할 수 없다. 그것은, 나만 안 당한다면, 내 이웃의 누군가가 무슨 일을 당하든, ‘좋은 게 좋은 거 아니냐’는 비루한 인생관의 발현이기 때문이다.
유족에겐 큰 결례이겠으나, 박정희가 살해되고 그 이튿날 느꼈던 안도감과 가슴 설렘을 나는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너무 이른 안도감과 가슴 설렘이었다는 게 이내 드러나긴 했지만.
고종석 객원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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