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나 왜 이래…. 손가락이 펴지지 않아요."
23년 전인 1985년 어느 봄날 아침, 여상을 나와 무역회사에 다니며 직장생활에 재미를 붙여가고 있던 김주혜(당시 26세ㆍ부산 수영구 민락동)씨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자고 일어나 보니 손가락이 뻣뻣하게 구부러져 오므렸다가 다시 펴는 것이 잘 되지 않았다.
"요즘 일이 많아서 피로가 쌓였기 때문일 게다. 조금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 어머니 신현순(당시 52세)씨가 딸을 안심시켰다. 하지만 며칠 쉬면서 안정을 취했는데도, 상태는 갈수록 나빠졌다. 뻣뻣한 증세가 손가락에서 팔로, 다시 발가락과 발목, 무릎관절로 확대됐다. 팔 다리의 힘도 점점 빠졌다.
그제야 이 병원, 저 병원을 찾아 다니며 치료법을 수소문했지만 허사였다. 의사의 진단명은 '류머티스 관절염'. 당시만해도 원인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난치병이어서 마땅한 치료법이 없었다.
김씨는 약 한번 제대로 써보지 못한 채 불구가 돼가는 팔 다리를 속절없이 지켜봐야 했다. 결국 1990년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꼼짝달싹 하지 못하는 1급 중증장애인 판정을 받았다.
발병 당시 3자매 중 막내인 김씨는 '처녀 가장'이었다. 두 언니는 시집을 갔고 아버지는 직장을 퇴직한 상태였다. 김씨의 수입으로 부모 등 세 식구의 생계를 꾸려왔지만, 뜻하지 않은 병마로 직장을 잃으면서 경제적 궁핍이 시작됐다.
김씨는 일을 워낙 잘해 여직원으로선 드물게 수출ㆍ입 업무를 도맡을 정도로 회사의 인정을 받고 있었다. "일 잘한다는 상사들 칭찬에 물불 안 가리고 열심히 했는데, 왜 내게 이런 끔찍한 병이 찾아왔는지 당시엔 억울한 마음에 잠도 제대로 안 오더군요."
어머니 신씨는 딸의 간병과 함께 졸지에 집안 살림을 떠맡아야 했다. 관절에 좋다는 구전(口傳) 처방은 거의 다 시도해봤지만, 별 효과가 없었다. 동네 병원에서 'ㄱ'자로 굽은 다리를 펴는 수술도 받았으나, 다리가 펴지기는커녕 오히려 신경을 잘못 건드려 오른쪽 발이 힘없이 축 져지는 부작용만 생겼다.
가족들의 근심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딸 셋 중에서 가장 똑똑하고 성격도 명랑했어요. 착하고 순진한 우리 딸에게 왜 이런 고통이 찾아왔는지 하늘이 원망스럽기만 하더군요."
혼자 힘으로는 거동조차 불편한 중증장애인에게 우리 사회는 '암흑'이나 다름 없다. 경제적 고통은 물론, 장애인을 터부시하는 주변의 따가운 시선과도 싸워야 한다. 이런 분위기에서 장애인들이 택할 수 있는 길은 별로 없다. 집안에 틀어박혀 은둔 생활을 하는 게 일반적이다.
"집이 연립주택 2층에 위치한데다 몸집마저 큰 탓에 나이 든 부모가 저를 데리고 외출하는 경우는 상상하기 어려웠어요." 실제 김씨가 2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바깥 세상 구경을 한 것은 1년에 평균 한 번 정도였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동네 사람들은 김씨가 집에 사는지조차 몰랐다.
하지만 워낙 낙천적이고 명랑했던 김씨는 좌절하지 않았다. 남들처럼 신세 한탄으로 세월을 보내지도 않았다. 대신 여고 시절 문학소녀의 꿈을 되살리며 책을 읽고 글도 쓰면서 지냈다. 친구와 전화를 하거나 인터넷으로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도 들었다.
20여년 간 집에서 은둔해온 중증장애인을 세상으로 불러낸 것은 이랜드복지재단이었다. 2005년 가을 우연히 이랜드복지재단 홈페이지에 들렸다가 '꿈을 이루어 드립니다' 코너를 클릭했다. 아픈 사람들의 사연을 접수해 선정되면 무료 수술을 시켜주는 이벤트가 열리고 있었다.
몇 달 뒤 김씨가 수술 대상자로 선정됐다는 전화가 왔다. 믿을 수가 없었다. "내게 이런 행운이 찾아올 때도 있구나" 싶었다. 부모님도 김씨를 얼싸안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설사 수술 결과가 좋지 않더라도 상관 없었다. 자신을 20여년 간 방안의 고독 속으로 침잠하게 만든 류머티스 관절염의 고통과 정면으로 부딪치는 기회가 주어진 것만 해도 감격스러웠다.
김씨는 이랜드복지재단의 주선으로 무릎인공관절수술을 받기 위해 2006년 1월 1일 부산 센텀병원에 입원했다. 인공관절 삽입수술 전후에 정밀 근육테스트와 걷기 운동 등의 재활치료를 집중적으로 받아야 하는 힘든 과정이었다.
병원생활은 4개월 이상 지속됐다. 수술 후 재활치료에만 2개월 가량 걸렸다. 마침내 2006년 5월 6일, 김씨는 병원을 '걸어서' 나왔다. "입원하면서 '어떻게 하든 퇴원할 때는 내 발로 걸어 나가겠다'고 다짐했는데, 소원을 이룬 셈이지요."
김씨는 비록 목발에 의존해야 하지만 20년 만에 혼자 힘으로 걷을 수 있게 됐다. 꿈에 그리던 세상 구경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집 근처에 다닐 때는 지팡이나 목발에 의존하고, 좀 멀리 나갈 때는 전동스쿠터를 이용해요. 내 발로 원하는 곳을 찾아가서 마음껏 구경할 수 있는 '행복'을 다시 찾았다는 기쁨에 한동안 밤잠을 이루지 못했어요."
김씨 어머니도 잃었던 웃음을 되찾았다. "꿈 많던 20대 처녀가 갑자기 방안에만 갇혀 지내는 처지가 됐을 때의 심정이 오죽했겠어요? 보통 사람 같으면 세상에 대한 원망과 신세 한탄에 삐뚤어진 생각을 갖기 쉬웠을 텐데, 짜증 한 번 내지 않고 밝게 살아줘서 오히려 딸이 고마울 따름이에요."
김씨는 퇴원 후 될 수 있으면 많이 걸으려고 노력했지만, 무리를 하면 어지럼증과 함께 고관절에 무리가 왔다. 해서 조심스레 조금씩 운동량을 늘려 나갔다. 수술 후 찾아온 가장 큰 변화는 세상에 대한 자신감이다.
김씨는 2007년 9월 한국휠체어장애인 문화예술제 준비위원회가 주최한 '수레바퀴 문학상' 공모전에서 수기 <그렇다고 꼭 불행한 것만은 아니었다> 로 장려상을 받았다. 또 같은 해 10월 한국여성발명협회가 주최한 '장애여성 발명아이디어대회'에서 미끄럼 방지용 목발을 제안해 은상을 받았다. 그렇다고>
목발을 사용하다 보니 물기가 있는 곳을 디딜 경우 미끄러지는 일이 잦아서 목발 끝에 삼발이 형태의 미끄럼 방지틀을 끼워 안정성을 높이자는 아이디어가 좋은 평가를 받은 것이다. "그저 투병생활의 경험담과 생활하면서 느낀 불편사항 개선 의견을 냈을 뿐인데 과분한 상을 주셨어요."
하지만 두 차례의 수상은 장애인도 세상을 향해 외칠 수 있고, 세상을 바꿔나갈 수 있다는 용기를 얻는 계기가 됐다. 김씨는 수상 이후 갑자기 할 일이 많아졌다. 그 동안 장애인 딸을 돌보느라 고생하신 어머니와 여행도 다니고 친구들도 마음 놓고 만나기 시작했다.
새로운 꿈도 생겼다. 4개월의 힘든 병원생활을 떠올리면 진저리를 칠 때가 많지만, 기회가 되면 팔목과 발목 인공관절수술도 받을 생각이다. 세수는 스스로 할 수 있어도 머리를 감거나 목욕은 아직도 연로한 어머니의 손을 빌려야 하기 때문이다.
팔목을 조금만 더 구부릴 수 있다면 사무보조업무 정도는 가능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드는 것도 이유다. "지금까지 많은 분들에게서 사랑을 받기만 했는데, 이제는 되돌려주고 싶어요. 아직은 정상적인 몸 상태가 아니지만, 팔목이 조금 더 부드러워지면 작은 봉사활동 정도는 할 자신이 있어요."
인터뷰를 끝내며 "아프기 전에 해보지 못한 것 중 가장 아쉬운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남자친구 한 번 사귀어 봤더라면 억울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웃음 섞인 대답이 돌아왔다.
부산=김창배기자 kimcb@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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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랜드 사회공헌 프로그램
'기업은 이익을 내야 하며, 그 이익을 바르게 써야 한다.'
의류유통 전문인 이랜드그룹(회장 박성수)의 제1 경영이념이다. 독실한 기독교인이자 자수성가 기업가인 박성수 회장은 "버는 것 뿐 아니라 잘 쓰는 것도 중요하다"고 늘 강조한다. 2002년부터 매년 순이익의 10%를 다양한 사회공헌활동 및 복지사업에 사용해온 배경이다.
이랜드의 사회공헌 프로그램은 ▲북한주민돕기와 제3세계 아동결연을 중심으로 한 생명건강 ▲전 직원의 70%가 참여하는 매칭펀드 프로그램 및 불우이웃에게 치료비를 제공하는 힐링핸즈 등의 지역복지 ▲교육지원 사업이 큰 줄기를 이루고 있다. 이 중 김주혜(49)씨가 지원 받은 프로그램은 힐링핸즈(Healing Hands), 즉 '치유하는 손길'이다.
힐링핸즈는 '메이크어드림(Make a Dream)'이라는 이름으로 2005년부터 시작됐다. 어려운 환경 속에 도움을 필요로 하는 개인이나 단체를 지원함으로써 인생의 전환점을 제공하자는 취지였다.
스스로 걸어보는 게 소원이었던 중증의 류머티스 관절염 환자 김씨와 희귀 안(眼)질환을 앓으면서도 '제 2의 안드레아 보첼리'를 꿈꾸는 성악과 학생 등 총 66명이 도움을 받았다.
많은 이들에게 희망의 통로 역할을 했던 메이크어드림은 2006년 10월 한 차례 변신을 한다. 꿈과 재능이 있지만 경제적 어려움으로 실현이 어려운 20세 미만 청소년들에게 힘을 쏟기로 한 것이다.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은 아이에겐 피아노, 박지성 같은 축구선수가 되고 싶은 아이에겐 축구공 등 모두 55명의 청소년에게 다양한 선물이 지원됐다.
올 들어 선물지원 사업은 다시 힐링핸즈로 변모했다. 매월 신청자를 받아 지원하는데, 현재까지 42명의 환자가 치료 기회를 얻었다.
이밖에도 이랜드의 사회공헌 프로그램은 다채롭다. 2003년부터 시작한 의류기증 사업은 2007년 말 기준 600만벌을 넘어섰다. 우리나라 국민 9명 중 1명은 옷을 받은 셈이다.
지난해 1년 동안 기증된 옷만 해도 190억원(판매가 기준) 규모다. 이랜드의 물품기증 사업이 눈길을 끄는 것은 재고상품이 아닌 신상품을, 지원 대상자들이 원하는 형태로 제작해 지원한다는 데 있다.
빈곤에 시달리는 북한 어린이들을 위해 2003년부터 지난해까지 모두 7,930톤의 감자와 170마리의 젖소, 6억원 상당의 결핵패키지를 지원하기도 했다. 이랜드 관계자는 "가장 소외되고 도움이 필요한 곳을 찾아 좋은 이웃,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기업으로 남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이성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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