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방문은 아버지 몫이었다. 그것도 큰 불상사가 없다면 1년에 딱 한번. 학년이 바뀌었을 때였다. “자식을 맡겨놓고 인사 한번 않는 것은 ‘예(禮)’가 아니다”고 했다. 1960년대 말에 작은 읍내 초등학교에서도 지금은 촌지로 불리는 여러 형태의 ‘와이로’가 있었지만, 평생 말을 없으니 아버지도 그것을 주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기억하는 것은 당신께서 그 자리에서 한 말이다. “이놈, 사람 만들어 주이소”, 한마디였다.
▦‘예’로서 학교를 찾는 아버지는 그나마 나았다. 아이가 ‘사고’를 쳐 호출을 받은 부모들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사소한 사고나 잘못은 그냥 ‘벌’로 넘어가지만, 정말 아이의 장래와 교육을 위해 부모에게 알려야 할 필요가 있는 경우였다. 그런 부모들은 우선 선생님이 민망해 할 정도로 자기 자식부터 호되게 혼냈다. 그리고 자식 보는 앞에서 ‘잘못 가르친 죄인’으로서 선생님에게 깊이 사죄했다. 아무리 철이 없어도 그 모습에 자신을 반성하지 않을 자식은 없었다. 그래서 그 시절 아이들에게 가장 무서운 것은 선생님의 “아버지 오시라고 해”였다.
▦집안 선례에 따라 나 역시 1년에 한번 학교를 방문하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선생님들의 반응이다. 초등학교 여자 선생님들은 혹시 무슨 항의나 하려 온 줄 알고 무척 당황해 했다. “아버지는 처음”이라는 선생님도 여럿 있었다. 그러면서 빈말인지 모르나 마지막에는 한결같이 “아버지를 만나니까 훨씬 얘기하기가 편하다” “남자 아이들은 아버지에게 얘기를 들어야 지도에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중ㆍ고등학교 남자 선생님들도 마찬가지였다. 하긴 “내 아들 잘 봐 달라”고 하고 싶은데 꾹 참고 아버지 흉내를 내 “말 안 듣고, 인간 안되면 두들겨 패이소”라고 해서 그런가.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가 추진중인 교권보호법안에 포함된 ‘학부모 등 외부인 학교출입 제한’을 놓고 찬반이 엇갈리고 있다. 교총은 교내 외부인 범죄사례와 선진국을 예로 들면서 “각종 상인, 범죄자 등의 무단침입으로부터 학생 수업권 보호를 위해서”라고 했다. 진짜 큰 이유는 최근 잇따른 학부모의 적반하장 격의 교사 폭행ㆍ 폭언의 사전 차단이다. 이에 대해 일부 학부모 단체는 “교사들의 이기주의적 발상으로 학부모를 교육주체에서 제외시키려는 것”이라고 반박하고 있다. 부모들이 학교 가는 것을 겁내던 시대에서 거꾸로 부모들이 학교 오는 것을 겁내 법까지 만들어 막으려는 시대로 변했다. 누굴 탓하라.
이대현 논설위원 leed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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