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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여성시대와 함께하는 우리 이웃 이야기] 20여년 직장생활 접은 아내 '내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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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여성시대와 함께하는 우리 이웃 이야기] 20여년 직장생활 접은 아내 '내곁으로'

입력
2008.07.03 0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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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집에 있다. 그 동안은 늘 혼자 대충 저녁을 차리고 마주앉은 이 하나 없이 혼자서 대충 허기를 때워왔다. 회사 일로 바빠 늦은 저녁이 돼서야 집으로 돌아왔던 아내가 이제는 집에 있다. 20여년 직장생활을 그만 둔 것이다. 아내 말로는 환갑 넘은 남편의 뒷모습이 너무나 초라해 보였다나? 하지만 난 안다. 그게 이유가 아니라는 것을.

어쨌든 좋다. 하루 일을 마치고 집에 들어가면 나를 위해 밥을 하고 나만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는 그 것만으로도 좋다. 아내가 회사를 그만둔 것은 아들 때문이다. 과일전문점을 시작한 아들이 주방에 모르는 사람을 들이는 것을 꺼려해 제 엄마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이다. 남편인 내가 수십 번, 아니 수백 번 그만두라고 할 때는 코방귀도 안 뀌더니 아들 한마디에 바로 사표를 던졌다. 아직까지는 내리사랑이 더 강한 모양인지.

그래도 난 행복하다. 사소하지만 아침에 일어나 함께 밥을 먹고, 난 논과 들로 나가 내 일에 푹 몰두하고…. 아내는 내 점심을 챙겨주고 아들녀석의 가게로 나간다. 그리고 저녁시간에 맞춰 집으로 돌아와 나를 위해 또 저녁상을 준비한다.

며칠 전이었다. 논에서 땀 흘리며 일하다가 문득 아내가 보고 싶어졌다. 혼자 쓴 웃음을 짓다가 결국 자리를 박차고 집으로 달려갔다. 외출준비를 하고 아들의 가게로 갔을 때가 아마도 오후 2,3시 경이었던 것 같다. 갑작스런 방문에 놀란 아내와 아들은 무슨 일이냐고 물었지만 난 마누라가 보고 싶어서 왔다는 말은 못하고 그냥 쑥스럽게 “으흠, 아니… 뭐 그냥 장사 잘 되나 해서…”하고 대충 얼버무렸다.

아내는 설거지로 정신이 없었다. 결국 난 “아이고, 힘들겠네"라고 소심하게 한마디만 건넸다. 날이 더워서인지 손님들이 계속 밀려 들었다. 아들녀석은 과일빙수와 과일주스를 만드느라 분주했고, 아내는 쏟아지는 빈 그릇으로 인해 손에 물이 마를 틈도 없었다. 나도 뭔가를 해야 할 것 같아서 아들에게 “뭐 할일 없니?”하고 물었더니 과일들 좀 깎아 달란다. 아내는 내게 “칼 여기 있어요. 손 조심해서 깎아요”하고 걱정을 해주었다.

한시간 반정도 지났을 때 아내가 시원한 키위주스를 들고 내게 왔다. 그리곤 과일 깎는 것을 거들면서 말을 건넸다. “뭐 하러 왔어요? 집에서 낮잠이나 주무시지” “그냥 혼자 있기도 좀 그렇고, 가게는 잘되나 싶기도 하고…. 허허.” “이것만 깎고 어서 집에 가요. 괜히 여기 계속 있으면 신경 쓰이니까.”

아내는 속도 모르고 자꾸 집으로 보내려 했다. 어차피 한시간 정도 남았는데 그 때 오붓하게 같이 들어가면 좋으련만. 결국 “나 간다”고 한마디를 던지고 가게를 나와야 했다. 그 때 밀려오는 씁쓸함과 공허함이란.

그렇게 나와 터벅터벅 주차해 놓은 차 쪽으로 가는데 문득 목욕탕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오랜만에 개운하게 이 허한 마음까지 확 씻어버리고 싶어 무작정 들어갔다. 얼마나 지났을까? 시계를 보니 아내가 가게를 나올 시간이 됐다. 부랴부랴 옷을 입고 다시 아들녀석의 가게로 뛰었다. 행여나 엇갈려 아내가 벌써 떠나지나 않았을까 하는 조급함에 빠른 속도로 내달렸다.

나의 두 번째 방문에 아들녀석은 “아빠, 무슨 일 있어요?”하고 걱정스런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막 주방에서 갈 준비를 마친 아내는 “거참, 오늘따라 이상하네. 왜 또 왔어요?”하고 물었다. “그냥…, 당신이랑 같이 가려고….” 숨이 가빠 몰아 쉬는 내게 아들은 “잠깐 앉아 계세요. 뭐 마실 거라도 드릴께요”라고 하는데, 아내는 인정머리 없게도 “됐어. 마실 것은 무슨. 집에 가서 마시면 되지”하고 말하는 게 아닌가. 오늘따라 유난히 보고싶었는데 역시 잔소리 대마왕 여편네였다. 아들 녀석이 주스와 함께 가져온 토스트를 불쑥 건네며 하는 말도 고작 “자, 먹어요”였다. 참으로 애교라고는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는 아내다.

그런데 아들이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아빠 이상해. 오늘 진짜 이상해" 하다가 갑자기 막 웃는 것이었다. “아빠 목욕하고 왔지? 볼하고 눈이 빨간데? 맞아. 엄마, 아빠 목욕하면서 시간 때우고는 엄마랑 함께 가려고 한 거야. 하하하…. 웃겨, 아~~ 웃겨.”아들녀석은 그렇게 제 애비를 놀려댔다. 그제서야 아내 역시 웃으면서 “진짜 나랑 같이 가려고 목욕하면서 시간 때운 거에요? 호호호…. 진작 말을 하지, 같이 집에 가고 싶다고. 볼하고 눈이 빨개질 때까지 탕 속에 있었던 거에요? 세상에나, 호호호…." 창피함과 무안함이 밀려왔다.

그렇게 아내를 차 옆 자리에 앉히고 집으로 돌아왔다. 오는 내내 아내는 나를 보면서 웃고, 또 보고 웃기를 반복했다. 내 빨개진 볼과 눈이 웃기는 건지, 아니면 오늘 내 행동이 웃기는 건지. 그래도 그 순간이 참 좋았다. 십여 년간, 그것도 평일에 아내를 옆 좌석에 태우고 집으로 돌아가는 그 순간이. 남들에겐 아무것도 아닌 일이지만 나에겐 지금껏 못해본 순간이 아니던가. 비록 “갑자기 당신이 보고싶어서 왔다”는 말은 못했지만 아내가 내 옆에서 웃기에 난 그저 좋았다

옆에서 “저녁을 뭘 해 먹을까?”하면서 쫑알대는 오십 넘은 아내가 그저 예뻐 보이기만 했다. 딸은 벌써 시집 보냈고, 아들도 품에서 독립시키고, 이제 집에는 오랜 세월을 함께 살아온 나와 아내만이 있을 뿐이다. 아내가 회사를 다닐 때는 몰랐다. 아내가 오기만을 혼자서 기다리는 내 생활이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내가 손만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곳에 있는 아내가 있는 지금은…. 결혼 전 아내를 처음 만나 설레었던 감정이 새록새록 되살아 나는 것 같다.

환갑이 넘어 손자까지 있는 사람의 주책인지 몰라도…, 회사를 그만둔 아내가 난 참 좋다. 비록 잔소리가 많긴 하지만.

충남 아산시 선장면 이상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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