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쇠고기 정국’에서 말을 아껴온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가 모처럼 입을 열었다. 그제 한 언론인의 칼럼을 엮은 <왜 박근혜인가> 출판기념회에 참석,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다. 호주에서 열린 동포간담회에서 “국민이 안심하고 납득할 수 있는 정부 대책이 하루 빨리 나와야 한다”고 언급한 지 꼭 보름 만이다. 왜>
지도자, 제3자일 수 없어
그 사이에 미국과의 추가협상이 타결되고, 수입위생조건이 고시되고, 과격시위와 강경진압이 맞물리는 등의 상황 급변으로 보아 결코 짧지 않은 기간이다. 박 전 대표의 말에서는 이런 시간의 흐름이 느껴지지 않는다. “추가협상 뒤 충분한 시간을 갖고 국민 이해를 구한 뒤 고시했어야 하는데 너무 급했다. 그러나 과격시위는 잘못이다. 과격ㆍ불법시위와 강경진압 어느 게 먼저냐는 논란이 있지만 둘 다 없어야 한다.”
초등학교 논술시험 답안이라면 100점일 수 있다. 그러나 많은 국민의 기대가 쏠린 강력한 ‘차기’ 후보이자, 여당 내 비주류 수장의 현실진단으로는 낙제점이다. 여야를 막론하고 정치 지도자는 사회현실의 제3자일 수 없으며 상황 변화에 따른 판단과 선택이 일상적으로 요구되는데, 그의 말에서는 관망의 시선이 두드러지기 때문이다.
그의 말에서 느끼는 의문은 이런 일반론적 이유에서만이 아니다. 그는 쇠고기 파동 초기인 5월 6일 “재협상밖에 방법이 없다면 재협상이라도 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어 이명박 대통령과의 5ㆍ10 회동 때는 “국민이 정부를 믿지 못하는 상황에서 국민의 소리를 잘 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6월 2일에는 “정부가 국민이 원하는 대로 해야 한다, 근본대책이 나와야 한다”고도 했다. 또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6월 9일 자신의 미니홈피에 띄운 “국민의 안전과 행복을 지키는 것이야말로 국가의 가장 큰 의무”라는 취지의 글도 쇠고기 문제와 완전히 별개라고는 보기 어렵다. 호주 발언 때까지의 일련의 발언은 ‘재협상, 또는 그에 준하는 근본대책’을 정부에 촉구하는 내용이었다.
따라서 자신의 요구가 추가협상을 통해 얼마나 실현됐는지, 추가협상 결과에 만족하는지를 분명히 밝혔어야 한다. 그랬다면 현재의 ‘고시철폐, 재협상’을 요구하는 시위를 두고 “과격시위나 강경진압 둘 다 없어야 한다”고 말하긴 어려웠다. 기껏 요구해 놓고 결과에 대해 아무런 평가를 내리지 않은 것은 박 전 대표의 개별적ㆍ구체적 잘못이다. 또 국민 이해를 위한 현실적 방법론의 천착이나 고시에 앞서 ‘충분한 시간’을 갖기 어려운 상황에 대한 판단이 없었으니 “너무 급했다”는 막연한 인식에 머물렀을 것이다.
4월 19일자로 이 난에 쓴 ‘박근혜의 선택’이라는 칼럼에서 박 전 대표의 잦은 ‘장고(長考)’에 의문을 표하며 선택과 결단을 촉구했다. 그나마 국민적 관심과는 거리가 있는 ‘친박 연대’의 복당 문제에 관해서였다. ‘쇠고기 정국’에서 그의 결단력에 대한 의문은 한결 커졌다.
결단력의 의문에 답해야
풍부한 정치적 자산을 가진 그가 왜 이렇게까지 이쪽 저쪽으로 눈치를 살피는지가 답답하다. 최소한 ‘도토리 키재기’를 하는 정치인들과 달라야 한다. 정치지도자에게는 신속하고 정확한 판단과 선택, 눈앞의 상황에 얽매이지 않고 멀리 내다보고 결단하는 힘이 꼭 필요하다.
결단력은 위기를 맞아 더욱 빛을 발하고, 지금은 경제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위기다. 더욱이 위기대응 능력을 잣대로 삼아 박 전 대표를 지켜보려는 국민도 늘고 있다. 이명박 정부가 협상 과정에서 소홀과 실수를 드러낸 것도 문제였지만, 그 이후 국민적 반발에 대응하는 위기대응 자세에서 심각한 약점을 드러낸 게 한 요인이다.
박 전 대표가 진정으로 ‘차기’를 겨냥하는 정치 지도자로서 우뚝 서겠다면, 나라가 어수선하고 민심이 요동치는 때일수록 분명하게 처신해야 한다. 이 대통령의 지지율 급락에서 보듯 민심은 물결친다. 그라고 특정지역의 소맹주로, 주변 의원들의 ‘득표 마스코트’로 전락하지 말란 법은 없다.
황영식 논설위원 yshw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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